세상을 꽃으로 수놓는다면… ‘신비로운 상상’ 작품이 되다

[컬처]by 세계일보

(55) 세상을 꽃으로 채우는 작품

최근 코로나 여파로 세상은 더 각박해져

미얀마 사태·혐오 범죄 등 얼룩진 세상

마음 정화시키는 형형색색 꽃이 그리워

韓 분단현실 나타낸 이용백作 ‘엔젤 솔저’

화려한 꽃더미 속 총든 군인의 모습 눈길

고정관념·편견 맞서 평화의 메시지 전해

홍인숙의 꽃글자 ‘…풍경-사랑 지나서 싸랑’

‘글자, 우리를 위로할 수 있나’ 의문서 출발

군더더기 버린 언어와 꽃의 하모니 큰 울림



세계일보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이용백 개인전 모습. ‘엔젤 솔저’의 군복을 설치한 모습이 보인다. 학고재 제공

#세상을 꽃으로 채우는 작품들


봄이 왔다. 예년보다 빨리 왔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사월 초입의 산책로를 날리는 벚꽃잎이 휘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더 촘촘해졌다는 미세먼지 사이에서도 꽃은 빛나 마음과 머리를 밝힌다. 이렇게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 세계 곳곳의 사건들을 목격한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지난달 미국 애틀랜타에서는 백인 남성의 연쇄 총격으로 아시안들이 사망했다. 여전히 수사 중이지만 모든 아시안을 죽이겠다는 전화 이후 저지른 범죄라고 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는 아시안 혐오 범죄는 이제 폭행을 넘어섰다. 미얀마에서는 총선 조작을 이유로 쿠데타가 일어나 한 달 넘게 지속 중이다. 반 쿠데타, 민주화 촉구를 외치며 시민들은 시위를 위해 길로 나섰다. 학살과 같아진 진압 속에 사망한 시위자의 수는 끝이 없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의 잔인성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얼마 전 읽은 글을 되새겼다. 미국 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보이지 않는 잉크’ 중 일부다. “저는 남과 다른 목소리가 지워질까, 쓰이지 않은 소설이 지워질까 두렵습니다. 그릇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까봐 속삭이거나 삼켜야 하는 시들 … 오로지 작가들만이 그 트라우마를 번역할 수 있으며 슬픔을 의미로 바꿈으로써 도덕적 상상력을 벼릴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떠올리며 예술의 다양한 역할들에 관해 고심했다. 그리고 세상을 꽃으로 채운 작품 두 점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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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Angel Soldier_Photo_no.1’. 학고재 제공

#이용백의 꽃 군인, ‘엔젤 솔저’


이용백은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서 그림을 배우고 졸업했다. 이후 미디어 아트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백남준을 만나러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아쉽게도 백남준이 교수직을 사퇴할 무렵이어서 제자가 되지는 못했다. 대신 그의 조언을 들어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에 진학했다.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연구 심화과정 조각과를 수료하였다.


작가는 활동 초반 미디어 아트를 주로 선보였지만 회화, 사진 등 매체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매체 활용능력은 날 선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해냈다. 곧 작품들은 국내를 넘어 국제 미술계에도 알려지며 인정받게 되었다. 2011년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 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 독일 라이프치히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엔젤 솔저(Angel Soldier)’(2005~)는 이러한 전시에서 선보였던 주요 작업이다.


화면 안은 꽃으로 가득하다. 해바라기부터 장미, 아네모네, 데이지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각각의 꽃이 가진 색들은 화려하게 전반을 만든다. 빨강, 보라 등 색이 난무한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장면. 그 장면에 빠져들어 한참을 보면 처음에 보지 못한 형태가 점차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다. 총을 들고 군모를 쓴 사람이 거기에 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군인이다.


2005년 처음 발표한 이 작업은 퍼포먼스 베이스로 영상 또는 사진의 형식을 취한다. 작품은 지극히 평범했던 어느 저녁시간에서 발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던 중 예비군훈련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내일 예비군 가야 하는데 귀찮아. 군복이라도 꽃무늬로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작가는 순간 내뱉은 자신의 말을 두고두고 곱씹어 작품으로 발전시켰다.


작품은 화려한 세상인 동시에 살벌한 전쟁터인 한국의 분단 현실을 보여준다. 군인마저 꽃으로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2008년 작품 속 군복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명찰에 예술가와 예술 관계자 100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백남준,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안상수, 배병우 등이다. 고정관념, 편견과 맞서 싸우는 예술인들을 군인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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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숙, ‘글자 풍경-사랑 지나서 싸랑’. 포스코미술관 제공

#홍인숙의 꽃 글자, ‘글자 풍경-사랑 지나서 싸랑’


홍인숙은 수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이후 성신여자대학교 조형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며 전시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내에 위치한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글자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전시로 큰 관심을 끌었다. 현재는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예술가로 사는 것’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작가는 두 전시에서 자기 작품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어느 해보다 고단한 이천이십년의 하루 하루고 우리는 왜케 계속적으로 힘들고. 근데 더 힘들어야 내일이 온다 하고. 모르던 사건사고로 알게 되는 새롭고 소중한 한 글 자. 글자풍경 {안,녕}을 / 그 / 리 / 고 / 있 / 어 / 요.” 롯데갤러리에서는 작품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마치 수천, 수만의 의미를 담았을 일상언어의 수고로움에 감사의 꽃다발을 건네는 것처럼 글자들은 작가가 만든 면류관을 쓴다.” ‘글자 풍경-사랑 지나서 싸랑’(2009)은 이러한 작업 중 하나다. 사랑해서 함께하지만 애증의 관계가 된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익숙하고도 낯선 글자가 있다. ‘싸랑’. 가로 150㎝에 이르는 화면에 커다랗게 쓰여 있다. 그림으로 존재하니 그려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연한 분홍을 띠는 복숭아 같은 자태는 보는 이를 화면으로 가까이 부른다. 그렇게 다가가면 수많은 꽃다발들이 글자를 이룬 것이 보인다. ‘싸랑’일지라도 여전히 사랑이 있기에 아름다운 세상이다. ‘랑’의 ‘ㅇ’ 속에서 달만이 이 세상을 고요히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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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숙, ‘글자 풍경-러브’. 포스코미술관 제공

글자 그림 작업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에 그려진다. 작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상 속 생각을 메모와 낙서로 남긴다. 사회와 개인, 어린 시절, 가족 생각의 내용과 대상은 다양하다. 이렇게 남긴 문장은 시간이 흐르며 간결한 시적 언어로 정화된다. 생각의 군더더기를 버린 언어는 화면에 옮겨져 보는 이의 눈앞에 나타난다. 만화인지 민화인지, 글자인지 그림인지 헷갈리는 신선하고도 새로운 형태로.


언어가 화면에 옮겨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작가는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먹지로 누른다. 먹지로 누른 상태에서 검은 윤곽선으로 다시 그린다. 이어서 색별로 판을 자르고 롤러로 칠해서 완성한다. 완성한 색 판만큼 프레스 기계를 돌리면 그림이 태어난다. 판화의 과정을 거치나 에디션이 없는 작품의 탄생이다. 작가는 대학원 이후부터 판화와 동양화를 오래 연구해 왔다. 모두 섬세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들이다. 작가에 의하면 드로잉처럼 빠르거나 컴퓨터 작업처럼 매끈하지 않은 자기다운 방식이기도 하다.


김한들 큐레이터

2021.04.1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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