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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국토 최남단 마라도 여행

by세계일보

산이수동항·모슬포항 마라도 여객선 타고 30분/톳짜장면 한그릇 게 눈 감추듯 비우고 마라도 천천히 걸어 한바퀴/기암괴석 쪽빛바다 어우러지는 풍경에 가슴이 시원/장군바위서 한해 소원빌고 동화속 풍경같은 마라도 성당·등대 오르면 한라산·산방산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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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성당과 등대.

섬의 가장 높은 언덕 위 우뚝 선 하얀 등대. 폭풍우 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환한 불빛을 밝혀주니 길 잃고 방황하는 배들엔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다. 우리 인생에도 등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길을 잃는다 해도 다시 안전하고 환한 길로 안내해 줄 테니. 북위 33도 6분 33초, 동경 126도 11분 3초. 우리나라 국토 최남단 마라도 등대공원에 올랐다. 끝에 서니 새로운 시작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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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수동항에서 본 형제섬.

◆ 버킷리스트 마라도를 가다

“짜장면 시키신 분!” 마라도에 간다고 하자 지인은 CF 카피를 따라 하며 짜장면 먹으러 가느냐고 되묻는다. 자기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마라도 짜장면이 너무 맛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 것 같다면서.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서도 휴대전화가 잘 터진다는 내용을 담은 한 이동통신업체의 CF가 방영된 것은 1997년. 아직도 ‘마라도=짜장면’이란 공식이 성립되니 참 대단한 CF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짜장면 때문은 아니다. 짜장면 맛집은 가까운 곳에도 차고 넘쳐나니 말이다. 그보다 우리나라 국토의 가장 끝이라는 존재감이 더 크다. 늘 신비스러운 느낌으로 여행 버킷리스트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청정자연을 거닐며 머리도 식히고 새해를 설계하기 좋은 곳, 마라도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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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수동항에서 본 산방산과 한라산.

두 곳에서 마라도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다. 모슬포 운진항에서 출발하는 ‘가파도·마라도 정기 여객선’과 송악산 산이수동항에서 출발하는 ‘마라도 가는 여객선’이다. 이름이 헷갈려 예약한 곳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경우가 있으니 위치를 미리 꼭 확인하도록. 보통 가파도는 운진항을, 마라도는 송악산 산이수동항을 많이 이용한다. 첫 배는 오전 9시20분, 마지막 배는 오후 2시10분으로 마라도 가는 배는 하루에 7차례 운항한다. 마라도에서 나오는 배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10분까지 9차례 있다. 체류시간이 1시간30분∼2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실제 가보니 꼭 지켜지지는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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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둘레길 절벽 주상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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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둘레길 절벽.

산이수동항에는 많은 여행자가 몰려 여객선 출항을 기다린다. 마침 날이 아주 맑고 투명해 송악산 둘레길의 깎아지른 기암괴석 절벽과 저 멀리 형제섬이 아주 예쁜 수채화를 선물한다. 항구를 출발한 여객선은 짙은 사파이어를 쏟아부은 듯한 쪽빛 바다에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곧이어 갑판에서 포근한 제주 바람을 즐기던 여행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을 쏟아낸다. 송악산 둘레길의 절벽으로 가깝게 다가서자 신기한 주상절리가 아주 또렷하게 보여서다.


억겁의 세월 자연이 빚은 아름답고 거대한 조각 작품이라니. 송악산 둘레길을 걸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인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절벽이 희미하게 멀어지자 이젠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그렇게 30분을 달리니 꿈에 그리던 마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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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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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살레덕 선착장.

◆ 짜장면 먹고 천천히 걸어서 마라도 한바퀴

살레덕 선착장에 쏟아져 나온 여행자들은 모두 한곳을 향해 달려간다. 마을 입구에 줄지어 선 짜장면집이다. 점심때라 혹시라도 자리가 없을까 봐 조급한가 보다. 다들 정말 짜장면 먹으러 온 식객들인 듯하다. 입구뿐 아니라 마을 안쪽에도 짜장면집이 많으니 서두를 필요 없다. 맛이 비슷하기에 어디 갈까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 빈자리를 찾아 앉자 주문한 지 5분 만에 짜장면과 짬뽕이 나온다. 한 젓가락 떠 입안에 밀어 넣자 웬걸!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예상보다 맛있다. 톳 등 해산물이 들어가서 그런지 뭔가 독특한 맛이다. 해물짬뽕이 더 맛있다. 바다향 가득 담긴 뜨끈한 국물 쭉 들이켜니 오전 내내 시달리던 숙취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래, 마라도에 오면 짜장면과 짬뽕을 안 먹을 수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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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톳짜장면과 해물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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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교회와 등대.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마라도 산책에 나선다. 아주 작은 섬이다. 해안선 길이 4.2㎞, 동서 길이 500m, 남북 길이 1.3㎞, 면적 0.3㎢에 불과해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선착장에서 마라분교 쪽으로 걷다 보면 할망당(애기업게당)이 나온다.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던 마라도는 매년 6월 초 망종부터 보름 동안만 들어갈 수 있었단다. 200년 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거주하던 이씨 부부는 숲에서 울던 버려진 여자아이를 데려와 수양딸로 삼았다. 그런데 나중에 친자식이 태어나자 그녀를 애기업게(보모)로 부렸다. 이씨 부부는 망종 때 해녀 몇 명과 씨를 뿌리고 조업하러 마라도에 들어갔다 거센 풍랑으로 갇혔다. 


나이 많은 해녀 꿈에 애기업게를 버리고 가지 않으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것이란 계시를 받았고 이씨 부부는 애기업게에게 심부름을 시킨 사이 마라도를 탈출했다. 이에 애기업개는 굶어 죽었는데 그녀의 저주 때문인지 그날 이후 바다에 빠져 죽는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이에 이씨 부부가 그녀의 영혼을 기려 당을 세워 매달 제를 지내자 사고가 드물어졌단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마라도는 화산 폭발로 생긴 섬으로 추정되지만 분화구는 없고 파도 침식으로 생긴 동굴이 많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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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팔각정 해안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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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분교.

◆ 마라도 등대 언덕 오르니 한라산이 한눈에

작은 섬이지만 학교, 교회, 절, 보건소, 파출소 등 있을 건 다 있다. 최남단 학교인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는 아쉽지만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학생이 없어서 2017년부터 휴교 상태. 주인 잃은 시소와 철봉만 덩그러니 남은 풍경은 좀 쓸쓸하다. 고운 잔디 깔린 운동장에 다시 아이들이 뛰어노는 반가운 풍경을 상상해 본다. 팔각정과 해수관음상이 우뚝 선 기원정사와 신작로 선착장을 지나면 선인장 군락지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이국적인 풍경을 만나고 드디어 ‘대한민국최남단’이라 적힌 표지석이 국토의 끝을 알린다. 여행자들이 인증샷을 찍느라 줄이 아주 길다. 국토의 끝에 도달해 버킷리스트 한 조각을 완성하니 기분이 묘하고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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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해안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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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바위.

맞은편 해안에는 기묘한 형상으로 솟은 장군바위가 보인다. 마라도 사람들은 섬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낸다. 자세히 보니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사자도 닮았다. 국토 끝에 이런 독특한 형상의 바위가 있어 신비스러운 느낌을 더한다. 영험한 기운 잔뜩 얻으니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한 해는 운수대통 할 것 같다. 바위 주변에 어선 10여척이 조업 중이고 갯바위는 이미 많은 강태공이 차지했다. 벵에돔, 감성돔이 잘 낚여 손맛을 즐기려는 전국의 낚시꾼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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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성당과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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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 조망 마라도 해안산책로.

표지석을 지나면 마라도 여행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억새가 일렁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예쁜 성당과 하얀 등대가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풍경에 너도나도 셔터 누르기 바쁘다. 제주를 상징하는 해산물인 전복, 소라 등의 모양으로 디자인한 성당은 동화 속에나 나올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성당이니 인증샷 남기고 마라도 등대공원에 오른다. 1915년 무인 등대로 불을 밝힌 마라도 등대는 팔각형 모양으로 16m 높이로 지어졌다. 동중국해와 제주도 남부 해역을 오가는 선박들이 우리나라 육지를 처음으로 인지하는 ‘육지초인표지’ 역할을 하는 등대로 약 48㎞ 거리에서도 확인 가능한 ‘희망봉’이다. 전 세계 유명 등대 미니어처로 꾸민 등대공원에 서면 저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이 어우러지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마라도 여행을 완성한다.


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