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코스모스를 딛고 가을님이 오시는 길, 광양 가을여행
‘보랏빛 향기’ 9월 중순이면 광양 서천변에 코스모스길이 펼쳐진다. 사진은 지난해 풍경. |
여름이란 놈이 어찌나 거세든지 언제 꽁무니를 볼까 궁금했지만, 홍두깨만한 빗줄기 장막이 걷히니 어느새 가을이 서있었다.
수줍은 신인 가을은 새빨간 단풍 이전에 화려한 코스모스 코트를 입고 들어선다. 버건디, 핑크, 마젠타, 와인레드… 그야말로 붉은 보석 색상계열의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이브생로랑 립스틱 샘플처럼 레드 안에서도 다양하다. 대도 가늘어 좁쌀만한 바람에도 한들한들 한다. 어찌 반하지 않으리.
전국에 코스모스 너울대는 길은 수도 없이 많지만 좀더 많은 색을 감상하기 위해 남도땅 광양을 갔다. 그곳엔 진정한 가을 색 그림책이 있었다.
광양 서천 코스모스길. 제공 | 광양시청 |
서천변 코스모스길
푸른 바다와 근사한 곡선미의 강, 우람한 산을 품었음에도 제철 공업도시의 이미지로 가려진 고을 광양. 사실 일년 내내 불 밝히는 포스코의 야경을 스스로 광양 십경에 꼽을 정도로 공업 도시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알고보면 천혜 청정 자연을 품은 유서깊은 고을이다. 백두대간 백운산의 정기 아래 이것저것 챙겨 볼 곳도 많다. 이곳의 가을에는 뜻밖(?)에도 눈부신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비록 단풍이 아직 이르다 해도 단아한 주황의 감(광양 대봉시)이 익어가고, 망덕포구 강물은 옥색으로 물들어간다. 여기다 서천변 산책로엔 총천연색 꽃까지 피어난다. 바로 코스모스다.
9월 중순이면 광양읍 서천 변에 코스모스가 주욱 늘어선 컬러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물 맑은 서천변 1.4㎞, 5만6000㎡ 꽃단지가 거대한 수채화 팔레트로 변하는 셈이다. 코스모스는 멕시코가 원산인 외래종이지만 언젠가부터 한국의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가느다란 꽃대에서 보석같이 어여쁜 채도의 꽃잎이 터져나온다. 길가에 늘어선 색색의 꽃은 가을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며 마치 오가는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선 듯 하다.
9월 중순이면 광양 서천변에 코스모스길이 펼쳐진다. 사진은 지난해 풍경. |
채도 또한 높다. 고귀한 흰색, 고운 한복치마같은 분홍색, 쪽물이 붉은 노을과 만난 듯 푸른 보라색, 와인을 닮은 자주색 등을 낸다. 이들이 한데 모이면 마치 화려한 색조를 뽐내는 신(新)인상파의 유채화처럼 남도땅 광양의 가을을 즐겁고 발랄하게 그려낸다. 꽃잎은 끝에서 톱니처럼 갈라진다. 고운 색도 모자라 모양까지도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을까.
자전거 도로를 조성해놓았을 정도로 평평한 길은 매우 걷기좋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어린아이, 장애인도 아주 편하게 둘러볼 수 있을 정도다.
서천변에는 사계절 꽃이 피어난다. 봄에는 유채를 비롯해, 꽃양귀비와 청보리가 자라고 여름에는 백일홍과 황화코스모스가 색을 물들인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한 가득 꽃망울을 터뜨리며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손짓한다.
서천변 분수쇼. |
때마침 광양 숯불구이 축제도 함께 펼쳐진다. 다음달 21일부터 열리는 대한민국 3대 불고기로 꼽히는 광양불고기는 ‘천하일미 마로화적’이라 해서 전국 최고의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해가 지면 식탁에도 혀에도 꽃을 피울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마침 전라남도는 ‘걷기 좋은 길’을 테마로 한 9월의 추천관광지로 광양 서천변 코스모스길을 꼽았다.
광양의 가을은 다양한 색을 낸다. |
감, 솔숲, 광양의 가을색
백운산의 넉넉한 품안에선 힐링의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다. 백두대간 호남정맥이 시작되는 백운산. 해발 1000m가 넘는 거대한 산이 남해를 굽어본다. 광양시가 운영하는 백운산자연휴양림은 다양한 수종이 우거진 속에 편안한 산책로와 숙소를 구비해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찾아 쉬어가는 곳이다.
광양의 가을은 원래 주황이었다. 9월 가을 땡볕이 훑고 지나면 주홍빛 가을 바람이 불어온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재 아니어도 품엄 즉도 하다마난 품어가 반길이 없어 글로 설워하노라’. 노계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枾歌),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나훈아의 ‘홍시’에서처럼 유독 부모님이 생각나는 과일이 바로 감이다.
9월이면 광양 백운산 억불봉 아래로 바알간 가을이 당도한다. |
감 시(枾).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달디단 열대 과일과는 달리 적당히 달면서 또 은근히 떯은 맛을 적당히 품은 과일이 바로 감이다. 까치에게 남겨줄 만큼 풋풋한 인심도, 호랑이를 겁먹일 정도의 기상도 지닌 과일이 감이다.
그런 감이 광양땅에서 익어가고 있다.
붉은 감이 익어가는 광양 땅은 단아한 가을 정취를 뽐낸다. 손대면 금세 발갛게 물들 것 같은 단풍잎이 ‘열정’이라면 노란 가을볕에 홍조를 띠며 익어가는 감 송이는 ‘단아’ 그 자체다.
광양은 빛 광(光)에 볕 양(陽)을 쓰는 고을이다. 이름처럼 일조량이 전국 최고 수준이다. 그래서 가을 햇살을 즐기기에 딱이다.
지금 광양에 가도 백운호에 드리운 가을의 어스름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
백운산 동쪽 진상면 백학마을. 수어호 호숫길을 돌아가는 길 곳곳에 주렁주렁 감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담장 안에서 밖으로 축 처진 가지에도 주렁주렁, 길가에도 감이 툭툭 터진다. 광양땅에서 그냥 보이는 나무는 죄다 감나무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감을 키우고 이를 말려 곶감을 만든다. 어른 주먹만한 대봉시로 만든 곶감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대봉시 곶감 역시 바로 가을볕이 생명을 불어넣은 명품이다.
광양에는 가을에도 푸른 색을 오롯이 간직한 대숲 등 여러 색상이 남아있다. |
가을볕이 한창일 때 감을 따서 깎아 그대로 말린다. 파란 하늘에 붉은 감이 영글어가는 풍경도, 대청마루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감을 깎는 주민들의 사는 모습도, 주렁주렁 매달려 볕을 쪼이고 있는 곶감 꾸러미 또한 보기 좋다.
여느 곶감처럼 찹쌀떡 모양이 아니라 광양 대봉시는 백운산 억불봉처럼 뾰족한 모양 그대로다. 평소 감을 즐기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입이 달달하니 침이 괸다. 감이 좋다.
여행정보
●둘러볼만한 곳=그럴리는 없겠지만 여전히 여름이 그립다면 백운산 5대 명품 계곡(성불.동곡.진상.금천.어치계곡)에서 탁족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구시폭포와 선녀탕이 있는 어치계곡 입구(진경산장)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이곳으로부터 구시폭포 낙엽길까지는 도보로 약 10분. 최상류 오로대까지는 약 1시간30분.
●먹거리=도선국사마을 아래 ‘옴서감서’는 피리탕을 잘한다. 피리는 피라미를 이르는 말인데 식당 앞 하천에서 직접 가을 피라미를 잡아 매콤하고 시원하게 끓여낸다. 미리 예약주문해야 한다. 2만5000원부터. (061)762-9186.
광양은 불고기 뿐 아니라 닭숯불고기도 유명하다. 지곡산장. |
광양읍내에 ‘옛날국밥’이 있다. 돼지 머릿고기와 콩나물을 넣고 달달 끓여 차린다. 국물은 진하고 든든하지만 의외로 단백하고 시원한 맛을 낸다. 건더기도 푸짐해 그야말로 국밥 한그릇에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다. 머리국밥 6000원. (061)761-1612
광양불고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서천변에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은 집들이 많다. 미리 재워놓지 않고 즉석에서 양념해 구리 석쇠에 올려 참나무숯불에 구워먹는 광양불고기는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맛이다. 불고기를 먹고난 후 양은냄비에 끓여먹는 된장도 근사하다. 시내식당(061)763-0360. 대중식당(061)762-5670. 삼대광양불고기(061)762-9250. 읍사무소 뒷편 금목서회관은 정갈한 남도 한정식처럼 한상 가득 차려나오는 반찬이며 다양한 메뉴가 좋은 곳. 특히 이집 등심과 생고기는 맛이 좋기로 소문났다.(061)761-3300.
광양 옛날국밥. 돼지국밥인데도 콩나물과 채소를 많이 넣어 깔끔하고 담백하다. |
백운산 인근 지곡산장은 광양식 닭숯불구이를 잘하는 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평일 휴일 할 것없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양념에 슬쩍 재운 큼지막한 토종닭을 석쇠에 구워먹는다. 싱싱하고 간간한 양념을 품은 토종닭은 특유의 졸깃한 식감에다 숯불향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낸다. 근위(모래집)와 껍질, 간 등도 별미다. 백운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다.(061)761-3335
광양 숲속의 아침 펜션. |
●잘 곳=광양읍에 깔끔한 필레모 호텔이 있다. 입지도 좋고 깔끔해서 가족단위 투숙객 들이 묵기 좋다.(061)761-8700. 옥룡계곡 최상단에 위치한 ‘숲속의 아침’은 아름다운 산정의 풍경과 졸졸 흐르는 계곡소리가 들리는 휴식처다. 아파트 도시민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공기 속 진한 피톤치드 효과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그저 자고 일어나는 것 만으로 휴양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의 만족을 느낀다. (061)762-0087.
광양=글·사진 스포츠서울 이우석 여행전문기자 demory@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