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TOUR #울진 해파랑길
인생이 싱거울 땐 ‘해파랑길’로 맛을 내요
제아무리 값비싼 롱 패딩도 이 햇살처럼 날 포근히 감싸주진 못할 거야.
하늘은 하늘색, 바다는 푸른색, 모래는 황토색, 일직선으로 그어진 이 색들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단지 걸었을 뿐인데 지금 이 기분, 무엇을 준들 바꿀까.
햇살이 감싸주고, 바다가 위로하는 해파랑길
아주 오래전 지금보다 길을 자주, 잘 못 찾던 시절이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열흘이 넘도록 매일 가던 길을 헤맸는데 아침에 해를 보고 나와, 달을 보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노리지는 않았으나 덕분에 허리에 남아돌던 살이 정리되는 효과가 있었다. 또 하나 괜찮은 점은 다른 친구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새로운 동네를 알게 된 것이다.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늘 가던 길로만 갔다면 나는 평생 그 새로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해파랑길’이라는 멋진 여행길이 있다. 해파랑, 그 뜻이 사뭇 궁금해 알아보니 단순하고도 명쾌해 무릎을 탁 쳤다.
첫 글자, ‘해’는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에서, ‘파’는 바다색의 ‘파랑’, ‘랑’은 해랑 바다랑 함께 걷는 길의 의미로 ‘~와 함께’라는 조사를 조합한 합성어란다. 해파랑만큼 이 길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도 없을 것 같다. 머리 위의 해는 홀로 걷는 사람의 벗이 되고, 짙푸른 바다는 묵묵한 위로를 건넨다. 아주 오래전 길을 잃었을 때 발견했던 낯설고 새로운 경험, 한편으로는 오늘 안에 집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해파랑길에서 안심으로 바뀌었다. 기자처럼 길을 잘 잃는 사람도 해파랑길에서는 걱정할 염려가 없다. 길을 잃지 않고도 매 순간 새롭고, 감동의 파도가 밀려든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르는 750km의 걷기여행길로, 경북지역은 경주, 포항, 영덕, 울진에 걸쳐 총 4개 구간, 18개 코스, 287.2km로 동해안의 해변길,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다. 기자는 울진 해파랑길 24코스를 마음에 담았다. 항구의 풍경, 동해, 소나무 숲을 두루 만날 수 있는 18.2km 코스다. 성인 여자인 기자는 평소 4km를 걷는 데 약 1시간이 걸리기에 18.2km는 약 5시간이 걸릴 것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걷기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시간들을 합한다면 좀 더 넉넉하고 느슨히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걷기 여행은 물론 자전거 여행길로도 그만이니 취향에 따라 지역, 코스, 일정을 계획하자.
해파랑길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에 위치정보시스템(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수신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다면 관련 앱을 내려받는 것이 좋다. 해파랑길 공식 홈페이지에서 각 코스의 GPS트랙 파일을 내려받으면 자동으로 연동되어 코스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내 음성이 울리니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나의 궤적이 진하게 표시가 되니 묘하게 도전의식이 생긴다. 대략적인 위치는 GPS 앱을 통해 확인하고, 한 손에는 울진군관광안내지도를 챙겨들고 꼭 보고 싶은 명소들을 체크했다.
지금 이 기분, 평생 간직하며 나아가길
울진 해파랑길 24코스는 후포항에서 시작하는데, 후포항만 해도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계속 제자리걸음, GPS 코스에 구멍이 뚫리는 줄 알았다. 후포벽화마을로 들어서면 후포 등기산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르막을 오르는데 포토그래퍼 실장님이 다홍색의 집 앞에 멈춰서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1997년 방영되어 1998년 막을 내린 58부작 드라마, 배우 최진실과 최불암, 박원숙 등이 출연한 <그대 그리고 나>를 촬영했던 집이란다. 저 아래 항구를 배경으로 집과 집, 작은 계단과 난간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후포 등기산 스카이워크가 있는 정상에 다다르자 울진의 푸른 바다가 요정의 주문처럼 ‘짠’ 하고 펼쳐진다. 하얀 벽과 파란색의 둥근 지붕, 그리스 산토리니섬을 상징하는 오브제는 알려주는 이가 없어도 포토 스폿이리. 넘실대는 동해를 품에 안고 벅찬 감동에 빠져든다.
덧신을 신고 후포 등기산 스카이워크를 걸었다. 유리 바닥 아래로 바다가 나를 삼키지는 않을까 정면만 응시한 채 조심히 걸어 나가자 어여쁜 여인이 하이파이브를 신청한다. 스카이워크 끝에는 용과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선묘’가 자리한다. 의상대사를 만난 애틋한 순간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시선을 끈다. 검은 바위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묘가 살아나올 것만 같다. 이제 동해를 옆구리에 끼고 해변 길을 걷자.
드넓은 해안에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파도가 뱉은 물고기를 노리는 갈매기들은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난다. 태풍의 영향으로 잠시 문을 닫은 울진바다목장해상낚시터가 해안에 긴 목을 빼고, 어르신 두 분은 작은 배낭을 멘 채 해파랑길을 걷는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인생에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묵묵한 뒷모습이다. 해파랑길 24코스를 지나 그는 어디까지 가려는가. 홀로 자전거 하이킹에 나선 사람을 조용히 응원한다.
걷는 길 사이에 붉은색의 해파랑길 이정표가 잘 오고 있음을 말해준다. 뿌듯한 마음으로 키 큰 소나무가 숲을 이룬 월송정 안으로 들어섰다. 코스를 살짝 벗어나 해안가로 가까이 다가서자 GPS 앱이 신호를 보내온다. 잠시 안내음성을 꺼두고 이 순간을 만끽한다. 황토색 해변 너머 지평선이 펼쳐진다. 하늘색과 그보다 진한 푸른색이 한 일 자를 그리며 나아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기분을 얼마에 살 수 있을까? 얼마를 주면 지금 이 기분을 팔까? 돈으로 살 수 없고, 팔 리 없는 지금 이 기분, 평생 간직하며 나아가길. 인생이 재미없다면 걸어보시길. 해랑 바다랑 나랑, 햇살이 감싸주고 바다가 위로하는 해파랑길로.
해파랑길 울진 구간(총 5개 코스 77.6km)
+ 23코스 고래불해변 ~ 후포항 11.9km 24코스 후포항 ~ 기성버스터미널 18.2km 25코스 기성버스터미널 ~ 망양정 23.2km
+ 26코스 망양정 ~ 죽변등대 12.9km 27코스 죽변등대 ~ 부구사거리 1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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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상미 사진 이효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