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우연이다
뜻밖의 스톱오버로 찾은 인생 도시 러시아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인생이 생각처럼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애쓰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도 있고, 아무 생각도 없던 것이 훅 들어오기도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내게 그런 도시였다. 애초에 여행할 생각도 없던 도시, 프랑스 파리로 가는 길에 단지 거쳐갈 경유지. 그런데 그 뜻밖의 경유지가 내 ‘최애’ 도시가 될 줄이야
모스크바 중앙역 |
으레 말했다. “여행지 선택은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다.” 파리라는 도시는 내게 낭만 그 자체였다. 언젠가 꼭 사랑하는 사람과 가겠다고 벼를만큼. 서른이 되자 친구들이 놀려댔다. “이제 그만 파리 다녀와. 그러다 노인정 단체여행으로 가는 거 아냐?” 그래… 다리가 떨리기 전에 혼자라도 다녀오자! 직항은 가격이 부담스러워 모스크바를 경유하기로 했다. 두근두근.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영어보다 더 낯선 러시아어에 눈앞이 아른거렸다. 여행 정보도 별로 없어 뭔가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도전인 느낌? 사람들 키는 또 왜 이리 큰 거야! 낯가림도 심하면서 낯선 사람과 낯선 도시를 만나면 흥분하는 나의 본능이 속삭였다. “이제 이곳은 너의 인생 도시가 될거야!”
갤러리같은 모스크바 지하철 |
스파시바, 이즈비니쩨!
사랑이 고파지던 모스크바
"갤러리 같은 지하철을 지나 붉은광장에 도착했다. 책으로만 보던 장소를 만나는 뭉클함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모스크바의 중심인 붉은 광장. 본래 뜻은 ‘아름다운 광장’이었으나 ‘아름답다(끄라스나야)’라는 단어의 다른 뜻인 ‘붉다’만 남았다. |
모스크바 공항철도를 타고 시내로 가는 길에 급하게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를 찾아본다. 스파시바, 이즈비니쩨. 두 번 환승 후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호텔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기에 붉은광장으로 향했다. 붉은광장으로 가기 전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긴 터널이었다. 바로 모스크바 지하철! 모스크바 지하철은 1935년에 개통해 역사만 80년이 넘고, 갤러리처럼 웅장하고 화려해 메트로 투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지하철역이 무려 180여 개, 배차간격은 30초 남짓으로 매우 짧다. 무리해서 탈 필요가 없으니 우리처럼 뛰어와서 타거나 밀지도 않는다. 승차감은 청룡열차 수준! 화려한 조각부터 옛 소련 정치를 선전하기 위한 그림까지, 지하철 내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갤러리같은 지하철을 지나 붉은광장에 도착했다. 책으로만 보던 장소를 만나는 뭉클함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모스크바 중심에 있는 크렘린과 붉은광장은 거대한 제국 러시아를 상징한다. ‘요새’를 뜻하는 크렘린(Kremlin)궁전은 14~17세기 건설한 궁전으로, 대공이 거주한 왕실이 자 종교적 중심지였다. 크렘린 궁전 성벽 아래의 붉은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Saint Basil’s Basilica)은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 모스크바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게임 ‘테트리스’에 나오기 때문에! 47m높이의 팔각형 첨탑을 중심으로 높낮이와 모양이 다른 8개의 양파 모양 지붕이 어우러져 상당히 이국적이었다. 1560년, 성당이 완성되자 그 아름다움에 탄복한 이반 4세가 두 번 다시 똑같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설계자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굼 백화점의 유리돔 |
붉은광장의 밤은 굼(Gum) 백화점이 밝힌다. 백화점에 뭐가 있겠냐 싶지만, 200여 개 점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룬 완벽한 균형감이 ‘백화점’이란 통념을 저 멀리 날려버린다. 어떤 날씨든 안락한 자연 채광을 선사하는 유리 지붕은 밤이 되면 우주선에 탄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이렇듯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굼 백화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장’이었다. 1889년 공장으로 건립돼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독재 체제를 겪으며 점포 1200개를 가진 국영 백화점으로 변모했다. 공장에서 상점, 백화점으로 공산주의의 상징에서 자본주의의 첫걸음이 된 이곳은 양손에 쇼핑백 하나 없이 나가도 전혀 아쉽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다. 1층에 있는 작은 슈퍼마저도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4층 푸드코트는 러시아 음식을 한 곳에 모아 놔서 이것저것 먹어 보기 좋다.
굼 백화점의 명물,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 |
기대가 없어서 더 좋았던 걸까, 마지막 코스라서 더 좋았던 걸까. 일몰 시간에 맞춘 고리키공원의 유람선은 그야말로 한 해의 전반전을 직장생활로 달린 나에게 선물과도 같았다. 고리키 공원은 모스크바의 센트럴파크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공원에만 30여 개의 식당이 있고 아이스크림, 솜사탕, 팝콘 등 이동식 간식 판매대가 늘어서 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마지막 오후의 볕에 온몸에 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됐다. 그래, 이 순간! 휴가를 내도 회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직장인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모든 걸 잊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보면 얼마나 더 좋을까? 사진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이 시리다.
첫인상은 블루,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대로만 걸어도 알 수 있다
모스크바 여행은 4일이면 족했다. 슬슬 아쉬울 때쯤 근교상 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삽산 열차(러시아 고속철도· 가격은 약 6만 원부터)를 타면 간단한 음료와 간식을 서비스로 준다. 신기하게도 내부에 옷걸이가 있었다. 러시아 겨울이 워낙 추워 외투가 두껍기 때문에 실내에서는 외투를 벗는 게 예의라고 한다. 약 4시간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의 첫 인상이 레드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블루다. 1918년까지 206년 동안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고 지금은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문화·예술·학술의 중심지로 찬란했던 러시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비롯해 카잔성모성당, 옛 해군성 등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어 그 자체가 17~18세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서울 황학동 같은 이즈마일로보 마켓 |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중앙역부터 박물관까지 ‘넵스키대로 (Nevskii prospekt)’로 쭉 이어져 있다. 이 길만 따라다녀도 다 구경하는 셈이다.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대성당에 버금가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피의 사원)으로 향했다. 미하일롭스키극장과 국립러시아박물관 루스키무제이, 피의 사원이 나란히 있다. 촛불을 닮은 지붕 모양도 인상적이지만 모자이크 프레스코화의 화려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기념품으로 사가기 좋은 러시아풍 체스와 마트료시카 |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최초의 계획도시다. 척박한 습지였던 이곳은 표트르 대제의 손에서 러시아 최고의 문화 도시로 피어났다. 그 시작점인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보인다. 예르미타시 박물관(겨울궁전)은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르네상스 작품과 바로크 화가의 걸작, 아시아의 회화 등 290만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성 이삭 성당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 계단의 연속이다. 500개의 계단을 정복하고 나면 온 도시가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성 이삭 성당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트페테르부르크 |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성 이삭 성당. 성당의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 계단의 연속이다. 500개의 계단을 정복하고 나면 온 도시가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보상이 따른다.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두오모보다는 덜 힘들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정말 멋졌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덕분에 고도 제한이 있어 도시 전체가 더욱 잘 보였다. 백야 기간에는 새벽에 가깝도록 전망대를 열어 둔다고 한다. 백야의 새벽에 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얼마나 다를지, 새삼 궁금해졌다. 어느새 도시의 오후가 절정에 다다른다. 도시가 모서리마다 살짝 살짝 빛나고 있다.
오후 7시가 예쁜 도시
"오후 7시. 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장 예쁜 빛이 떨어지는 시간이다. 그 느낌에 반해 셔터를 얼마나 눌러댔는지 모른다." 넵스키 대로의 오후 7시 풍경 |
‘백야’를 피부로 몇 번이나 느껴봤을까. 여행 다녀온 친구, 휴가 다녀온 회사 선배에게 물었던 질문들이다. “뭐가 맛있었어요?” “뭐 샀어요?” “뭐 봤어요?” “경비는 얼마 들었어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지 않을까 싶다. 내가 좋아하는 한 선배는 내가 줄곧 여행을 다녀오면 이렇게 묻곤 한다.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 “백야 현상을 느낄 때 피부가 느끼는 느낌은?” “스테이크를 먹을 때 맛은 어땠어?” 처음엔 변태 같다고 생각했지만, 질문을 곰곰이 곱씹어보게 된다. 여행 중간 중간 느끼는 감정에 대해, 여행이 끝난 이후 나는 얼마만큼 돌아보고 있을까?
“여행? 일단 출근을 안 해서 좋아요!” 하고 농담처럼 얼버무렸었다. 하지만 여행 전 계획했던 곳을 벗어나 우연히 만나는 지역에 대한 반가움, 그냥 들어가서 시킨 커피 한 잔이 맛 있던 곳, 여권을 잃어버린 줄 알고 당황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출근 뒤 5분이면 여행 간 기억을 까먹고, 10분이면 시차적응이 된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잊고 있나 보다. 누군가 여행을 다녀오면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잠시 미뤄둔 여행의 기억, 피부로 느끼던 온도, 당황스러웠던 감정…. 얄팍하게 남겨진 감정들을 건드리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나 싶다. 어쩌면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면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나만의 여행, 떠나고 싶어? 광고쟁이 엄지 사진관의 여행법
- 책도 좋지만 가고 싶은 여행지가 배경인 영화를 보고 가자.
- 여행할 때마다 나만의 ‘무엇’을 만들자. 예를 들어 우체국에 들러 나에게 엽서를 쓴다든가, 로컬 컵이나 자석을 수집한다든가,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든가. 할 때는 모르지만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쌓이다 보면 나만의 보물이 된다.
-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자 서점, 기차역, 우체국, 터미널, 재래시장 등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어 여행지에 가면 꼭 거기 만큼은 들러보자. 훗날 ‘내가 다녀온 세계 서점 리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 사진은 가로, 세로가 주는 느낌이 다를 수 있다 가로와 세로 모두 다양하게 찍어보는 연습을 하자.
글·사진 엄지(엄지사진관)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는 광고쟁이 5년차. 낯가림은 심하지만 낯선 사람과 낯선 공간을 즐긴다. 네이버 포스트에 연재하던 ‘신입사원 일기’와 ‘한 달에 한 번 직장인 여행 프로젝트’를 엮은 에세이 <수고했어, 오늘도>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