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스토리텔링 여행 #7. 백제부터 6·25전쟁까지 역사여행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에드워드 카)라고 했던가? 학창 시절을 지나자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어느 순간 역사와의 ‘대화’는 중단됐다. 시나브로 중년이 되어 다시 ‘대화’를 건네 본다. 나이 들어 좋은 점도 있다. 열정과 추진력은 줄었지만, 지혜로운 눈이 생겼다. 역사가 나와 동떨어진 먼 이야기 같았지만, 지금은 가깝게 느껴진다. 겨울의 초입,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충북 지역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TRAVEL STORY
청동기부터의 오랜 역사와 천혜의 자연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보물 같은 여행지, 충북. SRT매거진과 한국관광공사 세종충북지사가 함께 충북의 숨겨진 매력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사라졌던 백제의 산성을 찾아서, 증평 추성산성
흔히 ‘이성산성’이라 부르는 추성산성(사적 제527호)은 4~5세기 백제가 흙으로 쌓은 산성이다. 내성과 외성의 중첩구조,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의 배치 등 백제 성곽사 연구에 가치가 높다. 하지만 워낙 알려지지 않아 여행 정보가 거의 없었다. 한참 수소문해 도암면 노암2리 근처의 행정고개를 들머리로 산성까지 가벼운 트레킹을 계획했다. 동선은 행정고개~추성산성~노암2리~행정고개, 거리는 3㎞ 넉넉하게 2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다.
행정고개에 주차하고 출발하자 곧 능선 위에 올라섰다. 능선에는 느티나무 낙엽이 수북했다. 푹신푹신한 낙엽을 10분쯤 밟고 가자 전망이 열렸다. 이성산에 안긴 노암 마을이 평화롭고, 가야 할 능선은 부드러웠다. ‘이성산성 1㎞’ 이정표도 잘 나와 있다.
추성산성 영역으로 들어서자 먼저 평평한 잔디밭이 나왔다. 여기가 우물터다. 백제의 병사들의 이 우물로 목을 축였다. 한성백제시대의 산성에서 우물터가 발견된 적이 없었기에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우물터 위에 남성 망대지가 있었다.
망대지에 오르자 증평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증평은 청주, 괴산, 충주 등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곳이다. 추성산성은 백제의 한강 중상류 지역과 금강 중류 지역 진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산성 일대에 공사가 한창이다. 증평에 이렇게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음에 감사하며 노암리로 내려왔다.
투박하고 거친 고려 시대의 힘, 진천농다리
진천농다리(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는 하필 중부고속도로 옆에 있다. 불과 120m쯤 떨어져 있다. 많은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생긴 진동이 영향을 줄 만도 하지만, 농다리는 끄떡없다. 고려전기 권신, 임장군이 놓았다고 알려졌으니, 천년 넘는 세월을 버텼다.
농다리는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였다. 길이가 100m가 조금 안 되는 농다리를 건너본다. 중간 멈춰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발이 많은 거대한 지네 등에 올라탄 느낌이다. 농다리의 특징은 큼직큼직한 검은 돌을 석회물의 보충 없이 쌓았다는 점이다.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은 덕분에 장마철에도 떠내려가지 않는다.
농다리는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 같은 고려 시대의 불상을 보는 것 같다. 백제나 신라의 불상처럼 세련되지는 않지만, 크고 투박하다. 농다리도 그렇다. 농다리를 밟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건너갔을까? 농다리에는 한일 병합, 한국전쟁 등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면 며칠씩 울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농다리를 건너면 걷기길인 초롱길이 이어져 내처 걸었다. 정자가 서 있는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자 초평호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정자를 내려오면 데크가 설치된 수변길이 나온다. 데크 끝 지점에 초평호 건너는 하늘다리가 있다. 스릴 넘치는 다리에서 바라보는 호수 풍광이 일품이다. 초롱길은 농다리부터 하늘다리까지 3㎞, 1시간쯤 걸린다.
병 치료하며 한글 창제를 마무리하다, 청주 초정행궁
학창 시절 왕 중심의 조선 역사를 배우는 게 따분했지만, 세종은 예외였다.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를 반포했을 때는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졌다.
세종이 머물렀던 청주의 초정행궁이 2020년 6월 복원됐다. 초정행궁은 1444년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세종이 123일간 요양했던 장소다. 세종이 안질·소갈증·욕창 등으로 고생하자 대신들이 초정약수를 추천했다고 한다. 초정약수는 라듐 성분이 다량 함유된 천연 탄산수로 약 600여 년 전에 발견됐다. 초정이라는 지명도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관광안내소를 지나 행궁 안으로 들어서니 전시관이 보인다. 세종이 행궁에서 한글 창제를 마무리하고, 조세법을 개정하고 청주향교에 책을 하사했던 내용이 잘 나와 있었다. 전시관 뒤쪽으로 세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과 잠을 자던 침전이 있다.
전각들을 다 구경하고 나면 초정원탕이 나온다. 여기가 초정약수가 콸콸 나오는 샘이다. 하지만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대신 밖에 족욕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겨울철(11월~2월)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원탕 앞에 초정약수음수대가 있어 초정약수를 맛봤다. 한 잔 받아 벌컥 들이키니, 은은하게 톡 쏘는 맛이 올라온다. 속이 다 시원해졌다.
세조가 신미대사 만나러 가던 길, 보은 세조길
보은 세조길은 세조가 신미대사가 머물던 속리산 복천암으로 순행 온 역사적 사실에 착안하여 붙인 이름이다. 법주사 입구에서 법주사를 지나 복천암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4㎞, 2시간쯤 걸린다.
속리산으로 가려면 우선 말티재를 넘는 게 순서다. 말티재 고갯마루에 전망대가 설치됐다. 3층 높이의 전망대에 바라보면, 구절양장 휘어진 말티재 도로가 장관이다.
법주사 입구 상가촌이 끝나는 지점에서 법주사까지 오리숲길이 이어진다. 10리가 안 되고 5리만 이어진다고 해서 오리숲길이다. 굵은 소나무와 키 큰 은행나무, 그리고 활엽수들이 터널을 이룬 길이다. 맑은 공기를 심호흡하며 무조건 천천히 걸었다.
법주사 매표소를 지나면 ‘세조길 자연관찰로’ 안내판이 반겼다. 오리숲길의 종착점에 법주사가 있다. 관음봉, 문장대, 천황봉 등 우람한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속리산 최고의 명당자리다.
법주사를 구경하고 다시 세조길을 걸었다. 계곡에는 수량이 적지만,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계곡으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흩어져있는 까닭이다. 귀를 열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물소리가 번뇌와 망상을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목욕소. 피부병을 얻은 세조가 여기서 목욕을 하다가 월광태자를 만나 피부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세심정휴게소를 지나자 복천암이 나왔다. 세조는 복천암에서 삼일을 기도하고, 삼일 신미대사의 설법을 들은 후 복천암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샘물을 떠 마셔본다. 달고 진한 맛이 일품이었다.
뼈아픈 현대사에 내미는 화해의 손길, 영동 노근리평화공원
지난 11월 10일 노근리평화공원에서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노근리 사건 70주년을 맞아 노근리 사건 피해자 유족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유가족이 만났다. 한국전쟁 피해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다.
노근리 사건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5일 일어났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민간인 200여 명이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 희생됐다. 인민군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항공기와 기관총으로 쌍굴다리에 몰려든 피란민들을 공격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노근리평화공원 앞에 자리한 쌍굴다리를 찾았다. 쌍굴다리는 아치형 철도 교량이다. 1934년 경부선 철도용 교량으로 개근천 위에 세웠다. 쌍굴다리에는 흰색 페인트로 수많은 삼각형, 네모,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이는 미군이 난사한 총탄의 흔적이다. 노근리 사건은 아직 진상규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흔적들을 보호한다. 쌍굴다리 위로 고속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노근리평화공원으로 들어가 위령탑에 인사를 올렸다. 탑 왼쪽의 인물상에 눈길이 갔다. 피난 상황을 담은 희생자들로 맨 앞에 선 청년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결의에 찬 표정이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너른 잔디가 깔린 평화기원마당에는 한 가족이 손을 잡고 산책하고 있었다. 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공원을 가득 채웠다.
글·사진 진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