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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편안한 숨결, 강진

bySRT매거진

조선시대에 전라병영이 설치되며 도강군과 탐진현이 통합되니, 각각의 이름에서 하나씩, 강진(康津)이 되었다. 한자를 풀이하면 편안한 나루터다. 나루터라고 하기엔 너무도 큰 강진이지만, 선비의 18년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한 편안한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다.

강진만생태공원의 남포호전망대

남포호전망대에 오르자 강진만생태공원의 광활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에는 비 소식이 있던 시간, 강진의 하늘은 공활하다. 구름에 닿을 듯 키가 큰 황금 갈대, 먹색의 갯벌 , 갈 대밭 사이로 쉼터와 산책로, 백조 다리 등의 조형물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꽉 찼으나 여유롭고, 눈과 귀만 연 채로 있어도 흥미롭기만 하다.


길이 4km에 다다르는 생태탐방로

생물도, 사람도 반하고 마는 강진만생태공원

“짱뚱어만 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생태탐방로를 따라 걷는 길,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갈대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갯벌에 작은 생명체들이 눈에 띈다. 걷기를 이내 멈추고 몸을 잔뜩 수그린 채 갯벌을 응시하자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생명체들의 움직임이 관찰된다.  이것은 짱뚱어. 큰 녀석은 어른 손바닥만 한 길이고 손가락 길이만큼 작은 새끼들도 보인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짱뚱어는 철목어(눈이 튀어나온 모양)라고 소개되어 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미남 미녀 기준에 속하는 외모는 아니지만 기자의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두 눈은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하고, 머리부터 몸통은 둥글고 투실투실, 꼬리 부분에서 급격히 가늘어진다. 올챙이 같달까. 눈만큼이나 귀여운 건 가슴지느러미다. 좌우로 난 작은 지느러미를 지지대 삼아 갯벌 위를 미끄러지듯 활보하고,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나타나면 등지느러미를 위로 바짝 치켜 몸을 키운다. 오늘날 어류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짱뚱어가 소개됐는데, 눈이 튀어나온 모양을 두고 철목어(凸目魚),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 탄도어(彈塗魚)라고 기록했다. 갯벌 위에서 상대를 향해 빠르게 튀 어나가거나 높이뛰기(점프)를 하는 모양을 빗댄 것으로 추측된다. 짱뚱어는 강진만생태공원에서 살아가는 생물 중 하나로 동면을 하는 생선으로도 유명하다. 


기수역에 자리해 독특한 생물군이 서식하는 강진만생태공원

전남 장흥군에서 흘러온 탐진강이 강진만과 만나는 기수역에 강진만생태공원이 형성되어 있다. 기수역이란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을 가리키는 데 다양하고 독특한 생물군이 서식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지닌다. 강진만생태공원은 둑이 없는 열린 하구로 산지, 농경지, 소하천 등이 하구 습지에 인접해 식물, 조류, 포유류 등에 이르는 1131종의 생물이 서식한다. 갯벌 면적은 26.2㎢ 에 이르며, 그 안의 갈대 군락지만 66만1157㎡로 축 구장 면적의 90배가 넘는 규모다. 그러니 강진만생태공원에 방문한다면 반나절 정도는 여유롭게 시간을 빼두는 것이 좋다. 

강진만생태공원에 머물다 가는 겨울 철새, 큰고니

다만 강진만생태공원의 주인공은 우리 인간이 아닌 뭇 생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11월에서 2월 사이에는 겨울 철새인 큰고니 2500여 마리가 강진만생태공원을 보금자리 삼아 집단서식한다. 뽀얀 입김이 새어나오는 찬 겨울,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제 날갯 죽지에 고개를 파묻고 쉬는 큰고니의 모습은 신비롭고 우아하다. 어디 큰 고니뿐인가, 길이 4km에 다다르는 생태탐방로에 발걸음 소리마저 잔잔하게 걷다 보면 붉은발말똥게도 발견하고 노랑부리저어새, 수달과도 눈이 마주칠지 모른다. 농부의 들판은 수확을 앞둔 진노랑. 그 위에 여운을 남기듯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는 흰색, 연분홍, 진분홍으로 계절에 색을 더한다.

강진만춤추는갈대축제의 모습(매년 10월 개최)

동백나무 숲길 따라 다산과 초의의 우정

백련사 일주문 가는 길에 1500여 그루에 달하는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룬 큰 숲이 있다. 한겨울에도 동백나무 이파리는 두툼하고 윤기 나는 초록.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열, 수십 개로 뻗어난 가지들은 살아온 이야기처럼 굵고 거침없다. 전남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지역이다. 백련사는 그가 은거한 다산초당과 아주 가깝고, 이 동백나무 숲은 다산이 백련사의 초의선사와 함께 걸었던 길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

초의는 다산보다 24세나 어렸지만 두 사람은 학식을 교류하고 우정을 쌓았다. 초의는 다도의 달인으로 정평이 난 인물로, 다산이 호에 차 다(茶)를 쓸 만큼 차를 사랑한 데는 초의의 영향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다산은 백련사의 승려들과 협업하여 <만덕사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

만덕사는 백련사의 옛 이름으로 839년 만덕산에 세울 당시의 이름이다. 고려말에는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결사처(불교의 혁신운동)로서, 조선시대에도 많은 승려가 수행했다. 초의의 권유가 있었을까? 자발적인 호기심이자 책임감이었을까? 백련사의 역사서이기도 한 <만덕사지>를 통해 백련결사의 도량이었고, 어떠한 장인이 중수에 참여했는지 등 백련사의 이모저모를 소상히 알 수 있다.


백련사에서 보이는 가우도 일대

백련사에서 북쪽으로 25km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산과 인연이 있는 또 하나의 명소를 만날 수 있다. 다산은 1812년 초의선사,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 원림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했다. 백운동 원림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가 조성해 은거했던 별서 정원으로, 하룻밤의 시간이지만 다산에게 강렬한 기억을 심어주었다. 


다산이 못 잊어 그림과 시로 남긴 백운동 원림

그는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서시와 발문, 백운동 12경 등을 시와 그림으로 담은 <백운첩>을 남겼다. 다산의 애틋한 마음이 만든 시첩 덕분에 백운동 원림은 그때 그 모습으로 복원되어 오늘의 객을 맞이한다. 백운동 원림의 초록 대숲을 따라 걸어 나가면 월출산 을 병풍처럼 두른 곳에 드넓은 차밭이 나타난다. 뾰족이 솟은 월출산 봉우리는 <구운몽>의 팔선녀가 내려와 살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높고 기이하고, 그 품에 깃든 월출산 차밭은 보드랍고 따듯해 다산이 못 잊은 백운동 원림만큼 강렬한 인상을 뿜어낸다.


월출산 차밭(강진다원)

남도의 맛 따라, 멋 따라

강진군 병영면에서는 복원 사업이 한창인 전라병영성을 만날 수 있다. 전라병영성은 조선 1417년(태종 17)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강진군은 소실된 건물, 유적의 복원 정비 사업을 실시했다. 


조선왕조 500년간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 전라병영성

성곽의 길이가 1060m, 높이가 3.5m로 웅장한 멋을 드러내는 전라병영성은 현재 성문, 성벽의 복원을 완료했고 2029년까지 성 내부 건물과 외부 해자, 함정 등을 복원할 예정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 남문, 서문, 동문, 북문마다 아름드리 나무가 지키듯 서 있고, 인근 농가의 풍경이 더해져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선사한다. 천천히 걸어보니 성곽을 한 바퀴 도는 데 20여 분이 걸린다.


성벽과 성문이 복원된 전라병영성

병영면은 강진 10미 중 하나인 돼지불고기구이, 일명 ‘병영 돼지불고기’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밀집해 전라병영성을 보러 온 여행객들이 꼭 들르는 곳 중 하나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강진 현감의 친조카가 전라병영성 최고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로 부임해 축하 인사를 갔는데, 병마절도사가 현감을 웃어른으로 대접하며 양념이 잘 된 돼지고 기를 내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현감의 입맛을 사로잡은 돼지불고기는 오늘날 병영면에 돼지불고기 거리를 만들고 이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릴 정도로 21세기 사람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가우도의 청자타워와 망호출렁다리

병영면과 함께 대구면에 자리한 가우도 역시 특별한 매력을 뽐낸다. 출렁다리를 따라 건너가는 재미가 있는 작은 섬, 가우도에는 산 정상에 청자타워가 세워져 있다. 강진을 여행하다 보면 이 이색적인 공간이 랜드마크처럼 곳곳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리 입구에는 강진 농특산물과 로컬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가게와 식당이 모여 있고, 해 질 녘에는 인근 카페에 앉아 바다, 섬, 갯벌이 그려내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니 강진의 요소요소를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