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T 타고 일본 야마구치로 떠나는 여행
기차 타고 배 타고 떠나는 일본 여행.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아름답게 반짝이는 부산항대교를 시작으로 3박 4일 코스가 꽤나 알차다. 야마구치 대표 관광명소인 일본 3대 목탑 루리코지와 국보사찰 고잔지, 겨울에 빠질 수 없는 료칸 체험까지, 누가 만들었는지 칭찬받아 마땅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안토쿠 천왕을 기리는 아카마 신궁 |
1년 넘게 <SRT매거진>을 만들어 왔지만 정작 SRT를 타고 여행을 떠난 적이 없다. 매번 취재 때문에, 혹은 출장 때문에 SRT에 올랐는데, 이번만큼은 다르다. 진짜 ‘여행’을 즐기기 위해 수서역으로 향하는 것이다. 큼지막한 여행 트렁크까지 하나 챙겨 들고서!
SRT 부산행 기차는 오후 2시에 출발했다. 총 길이 50.3km의 국내 최장 율현터널을 지나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며칠 전에 내린 눈까지 소복소복 하얗게 쌓여 창밖 풍경을 눈부시게 꾸며 놓았다. 수서역에서 부산역까지는 고작 2시간 15분.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났다는 기쁨과 덜컹거리는 기차여행의 낭만에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는데 벌써 부산이라니, 빨라서 좋으면서도 빨라서 아쉽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부산항 신국제여객터미널은 부산역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3박 4일의 여행을 담당할 가이드를 만나는 것.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을까 했더니 총 42명이다.
부산항 신국제여객터미널에서 부관훼리 하마유호가 출항 준비를 하고 있다 |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연인도 있다. 오랜만의 패키지 여행, 이제부터 한 팀으로서 서로를 챙기며 움직여야 하니 서로의 얼굴을 익히느라 분주하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오후 6시 반부터 승선을 시작해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항까지 우리를 태울 부관훼리 하마유호를 구경하기 시작 했다. 레스토랑과 편의점, 대욕장, 노래방, 게임룸까지 저녁 시간을 즐길 요소는 충분해 보인다.
객실은 여러 가지 타입이 있어 누구와 함께 여행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데, 5인 이상 친구들과의 여행이라면 왁자지껄 즐길 수 있는 다인실도 추천할 만하다.
밤 9시가 되자 배가 서서히 움직인다. 이때부터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갑판으로 나와야 한다. 부산항 야경은 물론이거니와 부산항대교의 화려한 조명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색 빛깔로 빛나는 부산항대교 바로 밑을 지날 때에는 여행객들의 감탄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진다. 이렇게 일본 여행은 시작되었다.
천천히 보고 즐기는 일본 역사와 문화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경내를 청소하고 있는 소녀 |
이른 아침, 눈을 떠보니 시모노세키항이다. 낫토와 미소국을 곁들인 간단한 아침식사가 일본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배에서 내린 후에는 42명의 인원이 일정에 맞춰 버스로 이동하며 시모노세키, 우베, 야마구치, 미네 등 야마구치현의 곳곳을 들여다봤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일본 규슈와 혼슈를 가르는 간몬해협 입구에 위치한 아카마 신궁.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해 바다에 몸을 던진 안토쿠 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당시 천왕의 나이가 불과 8세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슬픔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더 슬프게 느껴진다. 아카마 신궁은 한때 조선통신사의 객관으로도 사용되었고, 맞은편에는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자리한다.
야마구치의 대표 볼거리인 루리코지 5층탑. 1442년에 목조로 만든 탑으로 일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루리코지 사찰 내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
다음 목적지는 약 100헥타르의 면적에 꽃과 식물, 백조와 펠리컨, 조각 등이 펼쳐지는 도키와 공원이다. 2년에 한 번씩 일본 최대 규모의 조각전 우베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으로 공원 중심부에 위치한 언덕에는 1962년에 제작된 무카이 료키치의 ‘개미의 성’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건 제23회 우베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우리나라 출신의 염상욱 작가의 ‘Self-Consciousness(자의식)’다.
역사와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을 찾아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인 아키요시동굴 |
야마구치 일정 중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루리코지였다. 일본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200년간 이지역을 통치한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 문화를 전승한 사찰로 무엇보다 오우치 가문 스스로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루리코지 경내에는 교토의 다이고지 5층탑, 나라의 호류지 5층탑과 함께 일본 3대 명탑으로 꼽히는 루리코지 5층탑이 자리한다. 오우치 가문의 25대 요시히로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42년에 세운 5층탑은 31.2m 높이에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 사이에 우뚝 서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사찰 내에도 호기심을 부르는 볼거리가 많다. 소원을 들어주는 약수 바가지도 있고, 돌로 만든 부처님 발바닥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건강해진다는 불족석도 있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큼지막하게 제작된 108염주다. 천장에 매달린 108염주를 돌려 정확하게 8개를 떨어뜨려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그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숫자를 제대로 세지 못해 모자라기도 하고 너무 힘을 줘 넘치기도 한다. 소원 빌기 참 어렵다.
루리코지에 이어 찾아간 곳은 일본 최대 규모의 카르스트 지형으로 이뤄진 아키요시다이와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 아키요시동굴이다. 약 3억 년 전 산호초가 지반의 이동에 의해 지상으로 밀려나오면서 생긴 지역으로 탁 트인 시야 아래 펼쳐지는 하얀 석회암이 이국적이다. 심지어 눈까지 쌓여 더없이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총 길이 10km의 아키요시동굴도 신비롭다. 관광객을 위해 1km 코스를 개방하고 있는데, ‘황금기둥’, ‘100장의 접시’ 등 수억 년의 세월 동안 대자연이 만들어낸 조형물을 감상할 수 있다.
유모토 온천마을에 위치한 사이쿄 호텔의 노천탕 |
사이쿄 호텔은 다양한 객실을 갖추고 있다 |
쉼 없이 달려온 하루의 마무리는 역시 료칸에서의 휴식이다. 600년 전통의 온천마을 유모토에 위치한 사이쿄 호텔에 짐을 풀고 정갈한 가이세키 요리와 맥주 한 잔, 뜨끈한 온천욕으로 여행의 노곤함을 달랜다. 일본 온천의 백미는 역시 노천탕. 숲속 작은 연못처럼 꾸며진 작은 탕에 앉아 있으면 겨울바람의 차가움과 온천의 뜨거움이 동시에 스며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저녁 8시 반에 시작되는 가부키쇼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다. 일본 전통 춤과 노래 등을 감상할 수 있는데,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화장, 관중을 휘어잡는 퍼포먼스에 빠져든다.
야마구치에서 후쿠오카 기타큐슈까지
일본 국보이자 모리 가문의 묘를 모시고 있는 사찰 고잔지 |
벌써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여행을 멈출 수 없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일본 무사정권 시대의 조후 사무라이 마을. 작은 개울을 따라 크고 작은 저택이 이어지는데, 담벼락 너머로 살짝 보이는 정원만 보더라도 오랜 세월 얼마나 집을 잘 관리해왔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시모노세키를 지배했던 무사 모리 가문의 14대 모리토시가 1903년에 지은 모리 저택은 소정의 입장료를 내면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북촌 한옥마을을 걷듯 여유롭게 산책하며 올라가다 보면 모리 가문을 위한 국보 사찰 고잔지가 등장한다. 1327년 조후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으니 무려 700년 가까이 된 곳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간몬교 위를 달린다. 잠시 야마구치를 벗어나 후쿠오카 기타큐슈로 이동해 시장 구경에 나선 것이다. 기타큐슈 여행의 중심이 되는 고쿠라성을 지나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탄가 재래시장을 찾았다. 오래된 맛집과 지역 특산물이 빼곡히 들어선 시장이다. 어느 곳을 여행하든 전통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건 그 지역의 문화와 사람, 특산물 등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카스텔라처럼 폭신한 일본식 달걀부침과 입에서 달콤하게 녹는 양갱을 먹고 나니 벌써 떠날 시간.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탄가 재래시장은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기타큐슈의 대표 재래시장이다 |
다시 돌아온 시모노세키, 간단한 쇼핑을 마친 후 부산항으로의 출발을 앞둔 부관훼리 성희호에 올랐다. 여행 첫날 배를 탔을 때의 흥분과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젠 배에 머무는 시간이 익숙하다. 밤새 바다를 가로지른 배는 이른 아침 부산항에 도착했다. 3박 4일이 무척 짧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힘들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가뿐했던 여행. 그럼, 봄에도 한 번 가볼까?
부관훼리로 통한다! 갈 때는 하마유호, 올 때는 성희호
부산에서 시모노세키항을 연결하는 부관훼리 하마유호와 성희호. 각각 162m x 23.6m 규모이고, 하마유호는 스위트 2개, 디럭스 8개, 1등실 48개, 2등실 18개 등 총 76개 객실에 수용인원이 500명이고, 성희호는 2등실 10개를 더 추가해 총 86개 객실에 수용인원은 606명이다. 선내 레스토랑에서는 조식은 물론 일식과 한식이 준비되고, 24시간 이용 가능한 자판기가 설치돼 간단한 음료와 스낵을 먹을 수 있다. 이 외에 면세점과 멀티홀, 노래장 & 게임룸, 편의점, 대욕장 등을 갖췄다. 특히 성희호는 천(天), 지(地), 인(人), 해(海)를 기본 콘셉트로 데크별로 미술품을 전시해 선상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SRT 타고 떠나는 해외여행
㈜SR에서는 SRT를 타고 부산역으로 이동해 일본 대마도(쓰시마섬) 혹은 야마구치로 연결하는 해외여행 상품이 마련되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1~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대마도의 경우, SRT 수서-부산 왕복과 대마도행 왕복 티켓을 합한 가격이 10만 원대, 부산 시티투어와 대마도 여행을 겸한 2박 3일 코스는 30만~40만 원 정도다. 또한 SRT 수서-부산 왕복과 야마구치행 왕복 티켓이 결합된 원패스 티켓은 15만 원대, 료칸 숙박까지 포함한 3박 4일 상품은 30만 원대로 무척 저렴하다. http://tour.srail.co.kr|1800-1472
글 김정원 사진 유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