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헌트를 보기 전 알고 보면 좋은 83년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
2022년 한국 영화 빅4 중 가장 호평을 받고 있는 영화가 <헌트>입니다. 평가를 많이 따르는 이동진 평론가도 호평을 했습니다. 이정재 감독 입봉작인 <헌트>는 남산이라는 시나리오 판권을 사서 수년간 각색 끝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영화 <헌트>의 제목은 사냥이라는 뜻도 있지만 암살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1983년 전후로 전두환 정권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역사물이 아닌 시대만 차용한 영화라서 실제 역사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건은 역사의 사실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네요.
영화 <헌트>는 안기부(현 국정원)의 국내팀을 이끄는 정우성과 국외팀을 이끄는 이정재 사이의 알력 다툼을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군사 정권에서는 친위대 같은 조직을 경쟁시켜서 서로 견제하게 하기도 했죠. 이 80년대 안기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조직이었고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너무 많은 문제점 때문에 현재는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국내 사찰을 금지시켰지만 쉽게 조직이 변하지 않죠. 현 보수 정권에서 옛 버릇들 나오잖아요.
이 안기부는 첩보가 핵심으로 대통령 암살 시도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영화에서는 도쿄, 워싱턴, 태국 3곳에서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 시도의 배후에 내부 스파이인 동림이 있습니다.
서로가 동림이라고 생각하는 안기부 국내팀, 해외팀의 갈등을 복잡한 플롯으로 녹여냈다고 하네요.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헌트>의 배경이 되는 1983년 사건들을 알고 보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1. 아웅산 테러 사건
2. 이웅평 미그기 귀순 사건
3. 장영자 사기 사건
입니다. 장영자 사기 사건은 5 공화국의 경제적 몰락을 이끈 대형 사기 사건이지만 83년 당시 초등학생이라서 이름만 알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웅산 테러 사건, 이웅평 미그기 귀순 사건은 아주 잘 압니다.
전두환 쿠데타 정권이라는 비난을 무마하기 위한 행동이 많았던 해 1983년
1983년은 제가 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두환 군사 정권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주의의 봄을 군홧발로 꺾었던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이 됩니다. 국민은 물론 미국도 전두환 쿠데타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군사 정권을 벗어나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줄 알았던 국민들은 또 한 번 좌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국내외서 안 좋은 여론을 잘 알고 있던 전두환은 국민들 시선 돌리기인 3S 우민화 정책을 펼칩니다.
바로 SEX, SPORT, SCREEN 정책입니다. 돌아보면 1980년대가 한국 에로 영화들이 엄청나게 만들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각종 저질 3류 에로 영화들이 영화관마다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82년에는 국내 최초의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여기에 두발 및 교복 자율화에 통금 해제 등의 좀 더 자유로운 풍토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부분에 변화를 줍니다.
당시에도 정치 이야기는 많았지만 정치에 관심 없던 사람들은 전두환이 어떻게 정권을 잡았던 말던 상관없이 저유가·저금리·저달러 3저 호황에 참 돈을 많이 벌었던 시기였습니다.
국내외에서 전두환을 싫어하는 모습이 많았던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3년에는 사건 사고가 참 많았습니다. 1983년 2월 25일 서울 일대는 예고 없이 공습 사이렌이 울립니다. 북한 공군 전투 조종사인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을 합니다. 이 이웅평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사건이죠. 당시 북한 공군 전투기를 몰고 와서 미국에서도 관심을 가졌고 미그 19기를 분해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하죠. 귀순한 계기는 전투기에서 KBS 라디오 등을 청취하다가 남한이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깨닫고 귀순하게 됩니다. 8일 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끝에 대한민국 만세삼창을 하는 퍼포먼스로 마무리합니다.
1983년 5월 5일에는 중공 민항기가 춘천의 미군 공항에 불시착을 하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중국 상해로 가던 여객기를 납치범이 납치해서 한국으로 향합니다. 당시 중공은 적성 국가라서 외교 관계도 없었습니다. 중공은 특별기 편으로 한국에 도착했고 한중 외교의 서막 같은 사건이 됩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여객시 승객인 중국인들을 극진하게 대접을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40년 간 얼어붙었던 중공과의 관계가 해빙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
83년 6월에는 제4회 멕시코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한국이 역사상 최고 높은 국제 축구 성적인 무려 4위를 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당시 라디오로 청소년 축구 경기를 들으면서 응원했던 기억이 나네요. 승리한 다음 날은 교실에서 축구 경기가 펼쳐지기도 했고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축구였습니다. 박종환 감독은 손흥민급의 인기 스타였습니다.
영화 길소뜸의 한 장면 |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총 138일 동안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이어집니다. 초기에는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에서 6.25 때 헤어진 가족을 찾고 싶다는 사연을 통해서 이산가족이 찾아지자 너도나도 신청을 합니다. 그렇게 역대 방송 역사상 최장기 연속 생방송이 이루어집니다. 총 10만 건의 사연이 접수되었고 이중 5만 건이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1만 여 가족이 상봉을 하게 됩니다. 이해 여름은 온 국민이 울었다고 할 정도로 뜨거운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전 6.25 전쟁 잘 몰랐어요. 그런데 전쟁통에 헤어진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보면서 전쟁이 단순하게 군인들끼리 싸우고 죽는 것이 아닌 국민 모두의 삶이 파괴되는 잔혹한 일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당시 KBS 건물 외벽에는 이산가족을 찾는 소자보들이 가득 붙었습니다. 왜 1970년대에는 이런 기획을 못했을까 합니다만 한국에서 가정마다 전화 보급이 급속도로 늘었던 시기가 70년대 말 80년대 초입니다.
저희 집도 82년인가 전화 신청을 하고 한 6개월 후에 첫 전화가 설치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TV를 보면서 아는 이름이 나오면 전화로 서로 목소리 및 인적사항을 체크한 후 전화상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감격의 눈물을 뜨겁게 흘렸습니다.
1983년 비행기 관련 사건 사고가 참 많았습니다. 1983년 9월 1일 미국 앵커리지를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기에 의해 격추됩니다. 비행 착오로 소련 영공을 날던 여객기를 소련 전투기가 격추한 이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서 반공 시위를 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미군이 보유하던 GPS 정보 데이터를 전 세계 여객기가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스마트폰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83년 10월 8일 6개국 순방
전두환 정권은 해외 순방을 참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정치인들은 국내 문제가 복잡하면 해외순방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지지도를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제가 이걸 왜 기억하냐면 툭하면 수업 중간에 교통비도 안 주면서 한강변 88 강변도로변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량이 태극기 등을 뿌리면 그걸 들고 흔들어야 했습니다. 돌아보면 군사 정권이 만든 짜증 나는 풍경이죠. 북한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한 10초 정도 흔들면 해외 정상이나 전두환 대통령 차량은 쑥 지나가게 됩니다.
이 순방은 버마(현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를 방문하는 순방이었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고 발생
1983년 10월 9일 TV에서는 긴급속보를 방송합니다. 첫 순방국인 버마에서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버마의 아웅산 묘소 폭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버마의 독립 영웅 묘소를 참배하는 일정이 있었고 많은 기자와 장관 참모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폭탄은 묘지의 기둥 상단에 폭탄이 설치되었는데 이 폭발로 인해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희 산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을 포함 총 17명이 사망합니다. 현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가면 당시 사망한 분들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 버마 폭탄 테러 사건은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었습니다. 당시 3명의 공작원 중 1명은 사살되고 2명이 버마 경찰에 체포되었고 1명이 모든 것을 불어서 북한이 어떤 짓을 했는지 전 세계에 알려집니다.
당시 이 폭발 현장 장면은 근처에 있던 취재 기자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ENG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했지만 너무 잔혹한 모습이 많아서 모든 장면은 1년 후에 공개가 됩니다. 이 버마 테러로 인해 모든 순방 일정은 취소가 됩니다. 이 6개국 순방의 핵심은 인도였습니다. 지금도 인도는 러시아와 미국 어느 쪽 편도 안 드는 국가입니다. 이런 인도를 끌어들여서 UN 가입을 지지받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첫 방문국인 버마에서 테러를 당하고 모든 일정이 사라집니다.
왜 전두환 대통령은 폭탄 테러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이 버마 아웅산 테러의 목적은 전두환 대통령의 암살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시도입니다. 우리가 김일성 당시 북한 지도자를 암살 시도를 하지 않듯이 남한의 대통령 암살 시도를 하지 않죠. 그런데 북한은 놀랍게도 전두환 대통령 암살 시도를 합니다. 성공해도 문제 실패해도 남북한 극심한 대립이 불 보듯 뻔하기에 감히 생각도 못할 행동을 당시 북한 지도자인 김정일이 합니다. 1983년 당시 북한 지도자는 김일성이었지만 그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던 김정일이 서서히 부각이 됩니다. 재벌 족벌 기업도 아니고 왕도 아닌 공산국가가 세습을 한다? 당시 소련도 중국도 이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능력 과시를 위한 것과 함께 서서히 벌어지는 남한과 북한의 GDP 격차를 참지 못한 김정일이 대담한 계획을 세웁니다.
김정일은 공작원을 버마로 보내서 버아 아웅산 묘소에 설치합니다. 그렇게 전두환 대통령은 오전 10시 15분 숙소를 떠나 아웅산 묘소로 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버마 외무부 장관인 '유칫흘랭'이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외무부 장관이 숙소에 도착하고 행사장으로 안내를 하는데 10시 15분이 되어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당시 버마는 교통 사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버마 외무부 장관이 탄 차량이 고장이 났고 이로 인해 예정보다 조금 늦게 도착을 합니다. 이게 대통령의 생명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약속 시간인 10시 15분보다 4분 늦은 10시 19분에 버마 외무부 장관은 영빈관에 도착합니다. 대통령은 당연히 화가 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2분을 더 지체가 됩니다. 이렇게 일정이 연기되자 이계철 버마 대사가 벤츠 차량을 타고 먼저 이동을 합니다.
벤츠 차량에 태극기가 꽂혀 있고 이마도 살짝 넒 었던 이계철 버마 대사를 전두환 대통령으로 착각한 북한 공작원은 폭파 스위치를 누를 공작원에 신호를 보냅니다.
그렇게 먼저 도착한 이계철 버마 대사가 다른 장관들과 함께 서 있는데 이계철 대사를 전두환으로 착각한 북한 공작원은 바로 폭탄 스위치를 누릅니다. 이게 10시 28분입니다. 버마 외무부 장관의 지각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폭탄 중 하나인 소이탄이 불발되어서 그나마 피해가 적었습니다. 만약 소이탄까지 터졌다면 고온으로 인해서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버마는 북한과 외교 단교를 선언했고 많은 나라들이 북한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됩니다.
죽을 위기를 넘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당연히 크게 열을 받았습니다. 전방 부대는 벌초 계획을 세워서 북한을 침투할 계획까지 세웁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방 부대를 방문해서 보복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내립니다. 보복을 하면 반역행위라고 까지 말합니다. 이상하죠? 북진 통일할 기세를 가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왜 일선 군부대의 북한 침투 훈련까지 막아서면서 보복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전쟁의 피해와 참상을 현실적으로 잘 압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북한에 엄청난 피해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반면 미필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윤석열 현 대통령이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지 군인은 전쟁의 현실을 알기에 전방 부대를 다독입니다. 여기에 86년 아세안 게임, 88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더더욱 안되기에 화가 나지만 참습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엔 곧 전쟁이나 최소한 휴전선 인근에서 국지전이 일어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 소장 출신의 대통령이니 전쟁을 아주 잘 알고 잘하고 불같은 성질이라서 전쟁을 할 줄 알았지만 현실을 잘 돌아본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다음에 보복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두환 정권 기간 중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되네요. 당시 전쟁했으면 한국은 또 한 번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수 있습니다.
이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 터지자 들끓던 민주화의 목소리가 쑥 들어갑니다. 전국에서 반공 시위가 일어나고 국가 기조인 반공의 목소리가 더 커지게 됩니다. 지금도 닥치고 빨갱이 외치면 완벽한 방어 논리가 되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1983년에는 북한의 아웅산 테러, 소련의 KAL기 격추 등 반공의 깃발이 그 어느 해 보다 높이 멀리 펄럭였습니다.
쿠데타로 만들어낸 정권, 광주민주화 항쟁의 책임이 있던 전두환 정권은 이 2개의 공산국가의 테러와 만행으로 반공의 깃발을 올리고 서서히 국민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립니다. 그렇게 전두환 정권은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통해서 장기 집권을 꿈꾸게 됩니다.
민주화의 불꽃이 일어나면 반공의 소화기로 바로바로 끄는 일이 자구 많이 쉽게 일어나게 되었고 민주화는 점점 요원해지게 됩니다. 그러다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으로 불꽃은 대한민국 전체를 끓어오르게 합니다. 이 아웅산 폭탄 테러 사태가 일어난 지 1달이 지난 11월 미국 신냉전의 상징적인 인물인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을 한 후 휴전선까지 돌아봅니다.
신냉전의 아이콘인 레이건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신냉전의 긴장 관계 속에서 지지율을 끌어올릴 기회가 되었다고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보통 지지율 낮은 대통령들이 지지율 올리기 위해서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용하잖아요. 요즘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냉전 스위치를 올리기 시작했고 이는 시진핑과 푸틴도 좋아하는 분위기입니다.
공포는 인류를 다스리는데 가장 편한 도구이니까요.
북한은 아웅산 테러 이후 폐쇄 국가의 길을 걷고 있고 그의 아들인 김정은도 폐쇄국가 모드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화 <헌트>에서 야외 총격 장면은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듯 합니다. 물론 현실과 다르게 표현되지만 이 사건이 영화 스토리에 큰 역할을 한다고 하니 역사적 사실과 정치 역학을 알고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액션 장면도 많다고 하니 큰 기대가 되는 영화 <헌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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