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태국 스피드배구 본 이도희 전 감독 “호남정유 시절엔 더 빨랐죠”

[트렌드]by 더스파이크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발리볼데이트를 통해 배구 인생을 묵묵히 개척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컴퓨터 세터’, ‘코트의 여우’. 명세터들에게 붙는 별명이다. 이도희 전 감독도 그랬다. 세터 출신인 그가 선수로 뛰었을 당시에는 한국의 스피드 배구가 오히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7세 때 찾아온 변화

공격수가 아닌 세터 이도희

처음부터 세터 유망주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167cm의 신장으로 인해 공격수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학교 진학 후에는 미들블로커 역할도 맡았다. 이도희 전 감독은 “그 때 당시에는 리베로가 없었던 시절이다. 미들블로커도 리시브, 수비를 해야했다”고 전했다.


그러던 고등학교 1학년 그에게 크나큰 변화가 찾아왔다. 포지션 변경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세터를 하게 됐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지 않았다. 3학년 언니인 세터 선수가 국가대표팀에 차출되면서 김철용 감독님이 기회를 주셨다. 그 때부터 세터가 됐다. 늦게 시작한 만큼 토스가 좋지 않았는데도 언니들이 공격을 잘 해줬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아울러 이 전 감독은 “2학년 올라가기 전 동계훈련 때부터는 외발 공격, A속공, B속공, C속공, 이동 시간차 등 하나씩 토스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그 해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우승이라는 달콤함도 맛봤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승을 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더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면서 “동시에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실업팀 호남정유를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호남정유 이도희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1985년 실업팀 호남정유 입단해서도 바로 주전 세터가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주어진 기회를 꽉 잡았다. 이 전 감독은 “선배 언니가 있었다. 언니가 발목을 다치면서 기회를 얻었고, 그 대회 우승을 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다. 우승과 함께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첫 태극마크를 다는 순간이었다. 청소년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경험했다. 세계의 벽을 실감하고 좌절도 했다. 그는 “중국, 일본에 이어 3위를 했지만 대회 내내 엄청 긴장을 했고, 슬럼프가 왔었다. 팀에 복귀하고 나서도 토스를 못하겠더라. 트라우마가 심했다. 감독님이 혼도 내고, 달래도 봤다. 개인적으로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아무 생각이 없게 되더라”며 슬럼프를 고백했다.


이 전 감독이 입단 3년차가 됐을 당시 김철용 감독이 호남정유 지휘봉을 잡았고, 팀에도 변화가 생겼다. 세대교체와 함께 팀 플레이도 확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 그림 안에 ‘이도희’는 없었다. 이 전 감독은 배구공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는 “내 위로 언니 1명 빼고 대부분 은퇴를 하셨다. 재창단되듯이 젊은 팀이 됐고, 그 해 꼴찌도 했다. 당시 주전 세터도 내가 아니었다. 전국 랭킹 1위로 평가받는 신인 세터가 뛰었다. 왼손잡이였고 점프력도 좋았다”며 “난 대학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팀을 나가서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배구 인연이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시즌 마지막 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호남정유가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 감독이 코트 위에 올랐다. 김철용 감독이 다시 붙잡을 이유가 생겼다. 


이 전 감독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투입한 것 같았다. 그 때 당시에는 나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후회없이 뛰었다. 소리도 지르고, 재밌게 했다. 역전하면서 그 세트를 획득했다”며 “대회가 끝나고 김철용 감독님이 가능성을 봤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호남정유에는 신장이 크지 않은 장윤희 등과 함께 새로운 팀이 탄생했다. 이 전 감독은 “낮은 C가 그 때 만들어졌다. 플레이가 많이 낮아졌는데 여기에는 다른 세터보다 내가 잘 맞았던 것 같다. 다시 내가 주전 세터가 됐고, 장윤희를 포함해 고교 4인방이 들어와서 준우승을 했다”고 했다.

호남정유의 스피드배구

호남정유의 변신은 센세이셔널했다. 당시 최고 라이벌이었던 미도파와 현대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높이에서 열세를 보였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팀플레이를 펼쳤다.


이 전 감독은 “다름 팀들이 처음 보는 플레이를 했다. 키는 작았지만 엄청 빨랐다. 다른 팀들이 적응을 못했다. 스피드만이 아니라 수비도 잘하고 빠르게 움직였다”면서 “이후 아포짓 박수정이 들어오면서 윙스파이커, 미들블로커까지 살아났다. 그 해 우승을 하면서 9연패를 하게 된 것이다”고 힘줘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호남정유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대통령배 우승, 1995년부터는 LG정유라는 이름으로 1999년까지 슈퍼리그 정상 자리를 지켰다. 그야말로 무적함대였다.


이 전 감독이 “그 전에는 높이로 하는 배구를 펼쳤다. 모든 팀들이 그랬다. 이동도 하지 않고 개인 테크닉으로 하는 배구를 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 여자배구 판도를 흔들었고, 세계무대에서도 그 경쟁력을 입증할 수 있었다. 

1990년대 국제 경쟁력 입증한 한국 여자배구

“일본도 우리만큼 빠르지 않았다”

호남정유가 국내 리그 정상에 오르면서 김철용 감독도 주목을 받았다. 1993년 여자배구대표팀 사령탑이 됐다. 호남정유 주전 멤버들을 대거 발탁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그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 전 감독은 “국제대회에서 그렇게 빠른 플레이를 펼친 건 우리밖에 없었다. 이동 공격도 엄청 낮고 빠르게 했다. 일본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신체적인 조건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9m 폭을 이용했다. 이를 세분화해서 사이드로 공격수들이 이동하며 공격을 했다. 또 그 때 당시에는 서브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고, 백어택도 많지 않았다”며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호남정유가 추구하는 배구를 위해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전 감독은 “빠른 플레이는 단시간에 되지 않는다. 팀 구성도 맞아야 한다. 선수들 개개인 체력부터 시작해서 적응을 해야 하고, 내가 어떻게 받고 얼마나 빨리 공격으로 전환할지 몸으로 익혀야 한다. 세터와 공격수 호흡도 정교하게 맞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했다.


이는 현재 한국 여자배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전 감독은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 선수들의 기본적인 기술이 엄청 떨어지지 않는다”면서도 “다만 아쉬운 점은 중고등학교에서 키가 큰 선수들은 미들블로커로 쓴다. 팀 성적을 내기 위해서 리시브 훈련보다는 공격력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 프로팀에 와서 리시브 훈련을 시작하기에는 늦을 수밖에 없다. 180cm 이상의 윙스파이커 육성이 필요하다”며 한국 여자배구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세계선수권 4위 이끈 세터 이도희

한국 여자배구대표팀은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 국제배구연맹(FIVB) 세계선수권 4위라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이 전 감독은 세계선수권 세트 부문 2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혹독한 훈련도 소화해야 했다.


이 전 감독은 “아시안게임 가기 전에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했는데, 그 때는 전 종목 선수들이 다같이 수요일에 서키트 훈련을 했다.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됐다. 종목마다 자존심도 걸려있었다”면서 “그렇게 훈련을 하고도 배구팀은 이단 토스부터 서브리시브까지 추가로 훈련을 했다. 선수촌의 체력 담당 선생님이 부상을 당할까봐 걱정도 했다. 그런데 딱 한 마디 하시더라. ‘시키는 사람도 지독하지만 따라가는 선수들이 더 지독하다’고 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중일 중에 우리가 제일 열악한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메달을 못 딸 거라고 예상을 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남자배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기대하고 상금 1억원이 마련돼있었다. 그 상금 여자배구가 가져왔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1994년 세계배구 흐름을 회상하면 “높이로 하는 배구가 더 많았다. 요즘처럼 빠르지는 않았다. 또 기술적인 부분은 아시아 국가인 한중일이 좋았기 때문에 세계 TOP10 안에 들 수 있었다”면서 “이후 브라질이 서서히 빠르게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기술을 접목시켰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쿠바는 높이와 힘으로만 했고, 브라질이 빠르고 테크닉도 갖춘 팀이었다. 중국은 신장과 기술, 스피드까지 됐다. 이보다 높았던 팀은 러시아였다”고 전했다.  

지도자 이도희

1995년 4월 은퇴를 결심했다. 평소에도 책 읽는 것을 즐긴 그는 대학생 그리고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다. 결국 2000년 3월 슈퍼리그가 끝난 뒤에야 코트를 떠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면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은퇴할 즈음 미국으로부터 좋은 제안도 있었다. 이 전 감독은 “미국 대표팀에서 유학을 오라고 했다. 조건도 좋았다. 하지만 그 때 난 30대 초반이었다”며 선수 생활 마침표를 찍은 뒤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택했다.


2000년 은퇴 발표 이후 5년 만에 정든 코트로 돌아왔다. 흥국생명 코치를 맡았다. 2005-2006, 2008-2009시즌 흥국생명 코칭 스태프로 함께 했다. 2010년에는 호남정유가 전신인 GS칼텍스 코치로 팀을 지원했다(그 사이에는 KBS N, MBC스포츠, SBS스포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2017년 현대건설 새 사령탑이 됐다. 2019-2020시즌 V-리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조기 종료됐지만 현대건설은 1위로 시즌을 마쳤다. 당시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과 함께 여성 지도자의 자존심 대결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현재 여자배구계에서는 한국도로공사 이효희 코치, KGC인삼공사 이숙자 코치가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코치 모두 세터 출신이다. 이 전 감독은 “본인이 맡은 파트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고 조언을 남겼다.


2021년 현대건설을 떠난 이 전 감독은 여전히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배구로 할 수 있는 건 다 경험해보고 싶다. 분석관 빼고 다 해봤다. 해설위원, 대학강의, 초등학교 코치, 프로팀 감독 등 겪어봤다. 배구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면서 “이번에 협회에서 16세 이하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배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포지션별로 4명의 코치를 두고, 배구팀이 있는 학교 신청을 받아서 교육을 진행했는데 선수들에게 밀착해서 세세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팀에 있는 1명의 감독이 여러 포지션의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 어려운 부분이 세터다. 경험해보지 못한 포지션이라면 더 그럴 수 있다. 이런 기회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시스템적으로 잘 갖춰진다면 효과가 크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전했다.


끝을 이 전 감독은 “선수 때부터 나만의 원칙이 있었다. 일탈도 한 번도 안했다. 작은 일이든 주어진 일에 대충하는 건 없다”면서 “그동안 공부도, 선수도, 지도자도 해보고 싶은 건 거의 해본 것 같다. 앞으로도 어떤 일이 주어지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모토는 변함이 없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글. 이보미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2022.09.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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