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황홀함이 물결치는 '제주의 오름'
바야흐로 가을, 제주에 억새의 계절이 찾아왔다.
용눈이오름 노을 |
● 용눈이오름
우아미의 귀환
공식적으로 제주도에 위치한 오름의 수는 368개다. 실은 40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오름이란 무엇일까. 아주 쉽게 정리하면 제주도에 있는 200m 이하의 봉우리와 산은 죄다 오름이라고 간주하면 된다. 많이들 오름을 한라산 주변의 기생화산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름’이란 낱말 자체가 제주에서 통용되는 순우리말이다. ‘오름’은 우리말로 ‘산봉우리’를 뜻한다.
제주 성산읍 수산에서 구좌읍 송당까지 이어지는 11km 구간을 차로 달리다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되바라지지 않은 두 지역 사이에 제주 오름의 대표급 선수들이 잔뜩 모여 있기 때문이다. 백약이, 아부, 동검은이, 다랑쉬, 높은, 손지, 좌보미, 밧돌 등등. 오름에 붙은 순우리말의 이름이 참 예쁘다. 오로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그런 이유로 이 11km의 구간을 두고 사람들은 ‘금백조로’라는 공식 도로명 대신에 ‘제주 오름로’라 부른다.
제주 오름로 주변에는 대략 18개의 오름이 분포되어 있다. 그중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곳이 바로 용눈이오름이다. 무려 3개의 분화구를 가진 제주에서 손꼽히는 오름이며 인체에 비유되는 우아한 곡선미를 가지고 있다. 용눈이오름은 김영갑 사진작가가 사랑했던 오름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능선을 타고 물결치는 용눈이오름의 곡선을 보고 ‘오르가슴을 느낀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제주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 가면 그가 오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용눈이’란 이름은 용의 눈이 아닌, 용와악(龍臥岳), 즉 용이 누웠던 자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옛사람들에겐 움푹 팬 정상 화구가 그리 보였던 게다. 나무와 숲 없이 맨살 같은 초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용눈이오름은 사계절 각기 다른 색을 품는다. 억새가 넘실대는 황금빛 가을과 눈으로 소복하게 덮인 하얀 겨울은 용눈이오름이 가장 아름다울 때로 꼽힌다.
다시, 용눈이오름
제주를 찾는 여행객의 일정표에는 거의 용눈이오름이 빠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비례하는 명성도 있었겠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편안한 난이도가 큰 몫을 했다. 해발 247.8m로 워낙 나지막한 데다 중산간 지역에 자리해 있는 이유로 ‘88m’만 오르면 정상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 3,000~4,000명 정도의 탐방객이 용눈이오름을 찾는다. 지나친 사랑은 독이 되기 마련, 너무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로 오름은 제어 기능을 잃었고 심각한 생채기를 입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는 쓰레기가 쌓였고, 탐방로는 맨흙이 드러날 정도로 훼손됐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2년 2개월의 ‘자연휴식년제’다. 지역 주민들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 했다. 하지만, 여행객의 발길이 끊긴 자연은 놀라운 복원력을 발휘해 점차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고, 2023년 7월 용눈이오름은 다시 개방되어 탐방객을 맞이했다.
재개방의 소식을 듣고도 가을까지 기다렸다. 용눈이오름 능선과 굼부리를 뒤덮은 억새 군락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인내가 바닥난 10월 초 ‘제주 오름로’를 달렸다. 이미 주차장은 만원, 간신히 차를 세우고 탐방로로 들어섰다. 들머리에서 능선까지 이르는 길을 빙 둘러놓은 것이 예전의 코스와는 사뭇 달랐다. 바닥에 야자매트를 깔아 놓은 것도 새로웠다. 탐방객들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는 신중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 스멀스멀 키를 높이기 시작한 억새와 수쿠렁(지랑풀)이 정겹게 펼쳐진 능선길, 이미 높은오름 너머 하늘로 붉은 기운이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용눈이오름의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족하다. 대신, 구역 대부분이 말 방목지인 데다 사유지인 까닭에 정해진 탐방로만을 이용해야 한다. 굼부리로 오르기 전 탐방로 우측으로 봉긋하게 솟은 언덕이 보인다면 올라가 보기를 권한다. 하늘과 맞닿은 지점에서의 단독 숏도 좋고, 저녁 무렵이라면 높은오름, 손지오름, 동거문이오름 등을 배경으로 멋진 노을 사진도 담을 수 있다. 정상 굼부리는 아직은 일부만 개통된 상태다. 생태복원을 위한 노력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굼부리 둘레를 온전히 돌아볼 수는 없지만, 동쪽 끝 지점에서 일출봉과 우도를 조망할 수 있다.
●산굼부리
이른 억새가 전하는 온전한 가을
세계적으로 귀한 마르(Maar)형 오름
제주도에 수많은 오름 중 ‘산굼부리’는 유일하다. 제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마르(Maar)형’의 오름이기 때문이다. ‘마르’는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과 퇴적이 일어나지 않은 채 가스 폭발만으로 생긴 원형의 화구를 뜻한다.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산굼부리는 산의 크기에 비해 거대한 굼부리를 가진 기생화산이라는 뜻이다. 굼부리는 바깥 윗 둘레가 약 2,700m, 아랫 둘레가 750m, 그 넓이가 3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규모가 백록담보다도 크다. 산굼부리의 표고는 437m이지만 이미 주변이 해발 400m를 전후한 중산간 지역이라 실제 높이는 30m 정도에 불과하다. 분화구의 깊이가 100~132m나 되다 보니 주변의 지형보다 훨씬 낮아 움푹 팬 형태를 띠고 있다.
산굼부리는 ‘분화구 식물원’이라고도 불린다. 다양한 수종과 희귀식물들이 굼부리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의 식물들과는 다른 제주 동부 원식생의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산굼부리는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런 산굼부리가 가을이 되면 또 다른 이유로 관광객의 발길을 이끈다. 산굼부리의 나지막한 능선을 가득 채운 억새 군락 때문이다. 드라마 <결혼의 여신>과 영화 <연풍연가>의 촬영지로 알려진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억새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입구에서 입구 광장을 지나 분화구 전망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네 개의 산책로는 각기 다른 풍경을 품고 있다. 탐방객들은 무려 4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억새군락을 온전히 거닐 수 있다.
지대가 높다 보니 억새의 시기도 빠르다. 중턱으로 접어든 가을, 산굼부리의 억새는 절정이 머지않았다. 줄기에 힘이 붙으니 바람에 버티는 힘도 제법이다. 곳곳에 설치돼 있는 포토존에서는 억새 군락과 합일된 다양한 장면을 연출해 낼 수 있다.
중앙전망대는 산굼부리의 속살을 조망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곳에 서면 굼부리의 크기를 실감하게 된다. 휴대폰 카메라의 1:1 화각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구상나무길 건너편의 잔디 그라운드는 마치 골프장을 연상시킬 만큼 단정하게 조성돼 있다. 이곳의 산굼부리라는 글자 조형물은 SNS 등을 통해 널리 공유되는 인증숏 존이다. 꽃굼부리 내에는 제주 전통 무덤 4기가 있다. 묘 주변을 감싼 사각형의 돌담은 우마(牛馬)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다. 이 풍경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제주의 자연이 자연스레 품어 온 제주다운 풍경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민 Pick
가을, 반드시 찾아야 할 억새 오름 명소 5
따라비오름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따라비오름은 3개의 굼부리로 형성된 오름이다. 능선의 곡선미가 아름다운 데다 가을이 오면 오름 전체를 뒤덮은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오름의 여왕’이란 이름에 걸맞게 들머리 평원부터 능선까지 그 화려함을 뽐낸다, 정상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며 억새 숲 뒤편으로 큰사슴이오름(대록산)과 가시리 풍력발전단지가 햇살 아래 펼쳐진다.
손지오름
‘손지’는 ‘손자’의 제주도 방언이다. 생김새가 한라산의 축소판이라 해서 한라산의 손자 ‘손지오름’이다. 규모도 작고 비교적 한산하지만,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과 함께 억새가 아름다운 3대 오름으로 꼽힌다. 남쪽 알봉 아래로 펼쳐지는 목가적 풍경 또한 제주의 가을을 닮았다. 단, 일반에 생소한 이토록 비밀스러운 오름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들머리를 잘 찾아야 한다.
동검은이오름
제주도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름 중 하나로 추석 명절 달맞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2개의 원형 분화구와 말굽형 화구를 포함한 복합형 화산체로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가을이 오면 나지막한 화구와 둔덕 가득 억새가 자라나 멋진 풍광을 이룬다.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동검은이오름의 특징이다. 정상에 서면 문석이오름, 백약이오름과 성산일출봉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큰사슴이오름
큰사슴이오름은 ‘대록산(大鹿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따라비오름의 명성에 가려 있지만, 가을날 억새의 풍광만큼은 오히려 그를 능가한다. 일단 오름으로 접근하려면 그 주변을 가득 채운 억새밭을 통과해야 한다. 정상까지는 계단을 밟으며 곧장 올라도 되지만, 완만한 둘레길을 따라 편안하게 접근할 수도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가히 압도적이다. 마치 양떼처럼 꿈틀대는 억새의 물결이 발아래 펼쳐진다. 그리고 서쪽 한라산, 동쪽 성산 일출봉에 가 닿는 시원한 전망 또한 큰사슴이오름의 자랑거리다.
영주산
억새 명소를 꼽을 때 제주 영주산이 빠지면 섭섭하다. 성읍민속마을에 있는 영주산은 본디 나무 없는 민오름이었지만, 지금은 80%가 소나무 군락으로 덮여 있다. 그런데도 영주산의 억새는 여전히 아름답다. 산자락을 타고 자라난 억새군락 너머로 제주의 동쪽 바다가 시원하게 조망되기 때문이다. 제주의 오름 중 ‘산’이 붙은 것은 ‘신령한 기운’이 있음을 뜻한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은 724개다. 천국의 계단으로 불리는 그 끝에는 성읍저수지와 한라산 풍광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글·사진 김민수 에디터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제주도관광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