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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레미제라블의 ‘내일이면’

by원종원

레미제라블의 ‘내일이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 됐던 그 시절, <레미제라블>은 공연보다 음반으로 더 유명했던 작품이었다. 아직 우리나라 대중들이 장발장 이야기로 만든 뮤지컬이 있는지 잘 모르던 시절이다. 숙대 근처의 소문난 음반매장이 있었는데, 꽤 들을만하다는 설명과 함께 미국에서 밀수입한 LP판이나 CD가 무척 고가에 팔렸던 기억이 난다. 어렵사리 음원을 구하면 브로드웨이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이라고 큰 소리로 자랑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 지나 알게 된 것은 이 음반이 브로드웨이 산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연계에서는 사운드 트랙이라는 용어도 쓰지 않을뿐더러, 회색 표지의 두 장짜리였던 이 음반은 정확히 말하면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의 음반이었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 참여했던 배우들은 지금은 공연 가의 전설로 통하는 인기 스타들이다. 마리우스 역으로 등장했던 영국 뮤지컬 배우 마이클 볼은 이젠 중년의 풍채를 지니고 있지만, 당시 영국인들에겐 꽃미남 대학생 마리우스로 더 잘 통했던 배우다. 판틴 역으로 나왔던 페티 루폰느는 <에비타>의 오리지널 에바 페론을 연기했던 바로 그 미성의 뮤지컬 여배우였고, 에포닌 역의 프란세스 루펠은 이 역으로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모두 석권하고 토니상을 포함한 수많은 시상식의 주인공으로 등극했었다.

 

하지만 최고의 화제는 역시 주인공인 장발장이다.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음반에서 이 역으로 등장했던 아일랜드 태생의 명배우 콤 윌킨슨은 장발장하면 가장 먼저 손꼽히는 전설의 뮤지컬 배우다. 타고난 미성도 그렇거니와 폭넓은 음역, 특히 두성을 활용한 그의 창법은 ‘집으로(Bring Him Home)’ 등에서 감히 흉내내기 힘든 완성도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콤 윌킨슨은 런던 공연 이후 앞서 언급한 프란세스 루펠과 함께 브로드웨이 무대로까지 진출해 절정의 가창력을 선보이며 신화적인 뮤지컬 배우로 등극하는 유명세를 누렸다. 훗날 캐나다에서 제작된 <오페라의 유령>에서 주인공인 팬텀으로 등장해 큰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의 이름 뒤를 수식하는 설명은 역시 ‘장발장’이다. 

레미제라블의 ‘내일이면’

그에 얽힌 재미난 뒷이야기도 있다.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미국의 배우 노조에서는 그의 출연을 훼방 놓았던 적이 있었다. 비노조원이었던 그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사실 외국 배우가 브로드웨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브로드웨이 무대에서의 경력이 없으면 노조에 가입하기 힘들고,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경력을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자인 카메론 매킨토쉬는 단호했다. 브로드웨이의 흥행에서 콤 윌킨슨의 역할이 절대적일 것이라는 프로듀서로서의 감이 있었고, 그래서 그가 무대에 서지 않으면 공연의 막을 올리지 않겠다고 맞섰다. 결국 노조의 반대를 꺾고 콤 윌킨슨은 브로드웨이 무대에 등장하게 됐고, 그해 최고 인기를 누린 뮤지컬 배우가 됐다. 

 

콤 윌킨슨이 연기했던 장발장은 애호가들에겐 지금도 신화로 통한다. 지난 2010년에 열렸던 런던 O2 아레나의 25주년 기념 콘서트 마지막 커튼 콜에서 등장했던 것도 바로 콤 윌킨슨이다. 뮤지컬 영화에서도 화제가 됐다. 장발장의 영혼을 구해낸 디그니의 주교가 바로 그다. 마지막 장면에서 장발장의 영혼을 거두며 보여준 콤 윌킨슨의 미소는 아는 이들에겐 그 자체로 이미 감동인 영화 속 명장면이었다. 비록 무대에서 그가 연기하는 장발장은 이젠 더는 만나기 힘들지만, 음악이나 영상으로나마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어 다행이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앞서 설명한 런던 캐스트 음반이 ‘진짜’ 오리지널 캐스트 음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영어보다 훨씬 앞서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음원이 따로 있다. 바로 1980년 프랑스 트레마에서 제작한 두 장짜리 음반이다. 

 

원래 <레미제라블> 뮤지컬을 처음 구상됐던 것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 공연이었다. 작사 작곡을 맡았던 알랑 부브리와 끌로드 미쉘 쉔버그는 모두 프랑스 국적의 예술가들로 당연히 공연은 프랑스어를 염두에 두고 제작됐다. ‘진짜’ 오리지널 음원이라 불릴 수 있는 음반은 바로 이들이 처음 만들었던 1980년산 컨셉 앨범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뮤지컬을 재미있게 보려면 음악을 통해 감상의 맛을 극대화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때때로 제작자들은 공연에 앞서 음반을 먼저 발매하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선율에 익숙하게 만들고, 공연을 통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들려는 의도의 반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반을 바로 컨셉 앨범이다.

레미제라블의 ‘내일이면’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컨셉 앨범의 구조는 훗날 영어로 번안된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자면, 코제트가 부르는 뮤지컬 넘버가 그렇다. 영어 노래 ‘구름 위의 성(Castle on the Cloud)’에서는 천진난만한 꼬마가 장난감으로 가득한 구름 위의 성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이곳에선 누구도 울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원래 프랑스어 버전에서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내 왕자님이 오시네(Mon Prince Est En Chemin)’라는 제목으로 훗날 영어로 번안된 노랫말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성숙한 느낌을 준다. 프랑스어가 도버해협을 건너며 오히려 회춘(?) 한 셈이나 다름없다.

 

일반적으로 영어 버전과 비교해 프랑스어 음원의 감성 표현이 뛰어나다. 불어라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섬세함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음악적 구조도 영어로 번안되며 일대 수정을 가했다는 것을 역추적할 수 있어 흥미롭다. ‘내일이면(One day More)’의 조상격인 ‘내일(Demain)’은 후렴구에서 영어버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판타지같은 여운의 반복을 활용하고 있고,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원래 노래인 ‘민중의 의지(A La Volonte Du Peuple)’는 한층 격앙된 프랑스 혁명기의 민중 봉기라는 결연함을 느끼게 해 준다.

 

흥미로운 점은 뮤지컬의 흥행이 ‘진짜’ 오리지널의 대중적 인기도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레 미제라블’을 보고 음악적 재미를 즐겼던 마니아들은 자연스레 ‘원조’ 음반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래서 프랑스어 음반은 덩달아 인기를 누리는 별난 기록을 낳게 됐다. 원래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흥행은 80년 제작된 컨셉 앨범을 듣게 된 카메론 매킨토쉬가 그 성공 가능성을 보고 영어 버전으로 다시 재제작을 시도하며 이뤄진 일이었는데, 그 발단이 된 프랑스 음원이 뮤지컬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다시 브랜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니 그야말로 ‘죽었던 자식이 되살아나는’ 기적같은 흥행의 신화가 된 재미난 경우인 셈이다.

콤 윌킨슨의 노래 ‘집으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경지에 오른 예술을 보여준다. 10주년 기념 공연 장면은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2013년 우리말 버전의 프레스 콜 영상도 음악을 감상하기 좋은 자료다. 2015년 버전과는 조금 다른 노랫말이지만, 그래도 무대의 감동을 연상키에는 아쉬움이 없다.

2014년 토니상에서도 레미제라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선보였다. ‘오페라의 유령’의 스타 라민 카민루의 멋진 모습을 만끽할 수 있다.

사진제공 | ㈜레미제라블코리아

글 원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