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으로 떠난 나오시마 여행
미술작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여행지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휴가’를 바라보며 한 해를 버틴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가 되기도 전인 5월부터 지인들끼리 모여서 여행 계획을 공유하거나 여행 가서 입을 옷을 쇼핑하기도 하니 휴가만큼 유혹적인 마약도 없다. 하지만 나는 지난 여름 휴가를 포기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업무 이동으로 3달 전 미리 잡아두었던 싱가포르 행 티켓을 부랴부랴 취소하고, 호텔 위약금을 왕창 물었던 상황. 해외를 나가지도 않았는데,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쌩돈을 날렸다고 생각하니 휴가도 짜증나고, 그냥 서울에 있는 호텔 방을 잡아서 방콕이나 해야지 싶었다. 한국에 있으나 싱가포르에 있으나 어차피 여행 가면 술만 마실 거 굳이 비행기 좁은 좌석 안에 내 몸을 구겨 넣고 버틸 필요가 있나, 자조 섞인 생각들로 내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게 의미 없는 휴가를 앞둔 8월이 다가왔다. 가끔 인터넷에 접속해 서울 호텔 목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지인 S와 안동 이야기를 나눴다. 안동으로 놀러 가 안동소주도 마시고 한우도 구워먹을까, 식의 농담이었다. S와 나는 둘 다 워낙 애주가이기 때문에 꽤나 끌리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안동을 가기로 마음 먹은 순간, “카톡”. S가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그 링크는 바로 10일 뒤에 우리가 가게 될 나오시마 여행 코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우리가 정말 그곳으로 떠나게 될 줄은.
2015년 내 여름 휴가지는 일본에 있는 자그마한 섬 나오시마였다. 대학생 시절부터 가고는 싶었지만, 나오시마를 어찌 가지 막막했다. 하지만 여행은 역시 대책 없이 충동적으로 가야 하는 것 같다. 계획을 꼼꼼히 짤 때는 갈 엄두도 안 나던 나오시마 여행이 무계획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나오시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나오시마는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시코쿠 가가와현에 위치하고 있다. 흔히들 ‘예술의 섬’이라고 부르는 나오시마의 지명이 낯설 수도 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내 여름 휴가지를 듣고 “거기가 어디야?”라고 물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 미술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거대한 땡땡이 점박이 호박은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박이 호박(참고로 엄청 비싼 설치미술 작품이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도 봤을 것이다. 내가 본 쿠사마의 호박 시리즈 중에서도 그 노란 떙떙이 호박은 정말이지 가장 어울리는 장소에 놓여있었으니까. 바로 그 사진 속의 장소가 나오시마의 베네세 하우스 해변에 있는 방파제이다.
베네세 하우스는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 중 하나이다. 사실 나오시마는 구리 제련소가 있었던 작고 황폐한 섬이었다. 한때 사람들로 붐비고 활발한 섬이었겠지만, 점차 아무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 예술인들의 거대한 ‘화이트 큐브’로 변신하게 된다. 이를 나오시마 재생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일본의 거대 출판?교육기업인 베네세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이 손을 잡고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와 나오시마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베네세 뮤지엄과 베네세 하우스가 그 결과물이다. 우리는 안도 다다오가 만든 그 베네세 하우스에서 하루 묵기로 결정했다. 안도 다다오가 만든 곳에서의 숙박이라니! 그렇게 일본 현대 건축의 상징 속에서 잠이 들고,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나오시마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비싸지만 베네세 하우스에서 한번 꼭 자보라고. 베네세 하우스의 해변과 베네세 뮤지엄 곳곳을 아주 편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베네세 뮤지엄에서 3~4시간을 소요하며 미술작품을 봤다. 거기에 베네세 하우스 곳곳에 미술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거나 걸려 있기 때문에 그걸 찾아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미술작품이 섬 전체 곳곳에 걸려있다. 찾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
나오시마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지중 미술관(지추 미술관). 地中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땅 속에 지은 신기한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역시 안도 다다오가 만들었다. 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가들은 이름만으로도 쟁쟁하다.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월터 드 마리아. 이 세 작품을 보여주는 독립된 세 개의 방. 클로드 모네의 경우는 300 x 200cm의 거대한 <수련>이 걸려 있다. 인공조명 없이 자연 채광만 들어오는 모네의 방 경우에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흰색 대리석 70만개를 밟을 수 있는 이색 체험까지 겸할 수 있다. 제임스 터렐의 <오픈 스카이>는 나이트 프로그램으로 봤다. 의자에 앉아 네모난 구멍을 바라보는 프로그램이다. 터렐이 설치해 놓은 인공 빛에 따라 자연의 하늘 변화색과 맞물려 오묘하게 변하는 1시간 30분의 경험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목이 아프니 목디스크가 있는 사람들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1시간 30분 동안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밖에도 <오픈 필드> 작품도 볼 수 있다.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은 <타임, 타임리스, 노타임>. 방에 들어가면 신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계단이 눈 앞에 펼쳐져 있고, 좌우 혹은 중간에 오각형, 사각형 등 다양한 금색 기둥이 대형 구를 둘러 싸고 있다.
그리고 꼭 들려야 할 곳은 바로 ‘집 프로젝트(家プロジェクト>)’가 있는 혼무라 지역. 섬에 버려진 빈 집들이 예술가의 집들로 변모해 있다. 6개의 집들 중에서도 <미나미데라>와 <가도야>가 인상적이었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만을 위해 안도 다다오가 만든 <미나미데라>. 절을 허문 뒤 만든 목재 건물엔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사람들이 입장한다. 칠흑 같이 깜깜한 공간들을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가다 보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앞쪽에서 푸른 빛을 볼 수 있다. 터렐의 작품들은 어찌나 신비로운지. 인간의 시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터렐에게 큰 박수를 속으로 치며 나왔다. 미야지마 타츠오의 <가도야>에는 총 세 가지 작품이 설치 되어 있다. 200여년 전 만들어진 집에 설치된 미술작품들은 나오시마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주민들의 ‘시간’을 디지털화하여 보여준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계획 없이 갔던 나오시마. 그곳에서 지냈던 1박 2일 동안 우리는 많은 미술작품을 만끽하고 체험했다. 그저 ‘보았다’라는 시각적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나오시마 전체를 빌린듯한 기분으로 이곳 저곳을 걸었다. 섬 자체가 주는 고즈넉함과 더 이상의 발전을 멈춘 푸르른 공간들.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내내 돌아다녔으니 성공한 뜻밖의 여름 휴가였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앞으로 10일 뒤에 우리처럼 다카마츠행 비행기에 몸을 실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당신도 많은 것을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덧) 사누키 우동을 아주 많이 먹는 게 좋다. 한국엔 이런 우동 팔지 않으니 아주 양껏 먹길 |
글ㆍ사진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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