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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홍차 티백이 담긴 뜨거운 물처럼 사방이 붉게 물들어 간다

오비히로의 가을,
그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by예스24 채널예스

영원을 소망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영원을 실패하는 계절이다. 걷고 달린다. 그렇게 이 계절에 밑줄을 긋는다.

오비히로의 가을, 그곳으로 가고 싶어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은 이신조의 소설집 『감각의 시절』에 수록된 단편,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오비히로로 가는 열차

그 여름이 끝난다. 너와 나는 가을로 진입해야 한다.

 

뺨에 닿는 바람이 금세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나뭇잎들은 느닷없다는 듯이 자꾸만 붉어졌다. 이내 힘을 빼고 물기를 잃었다. 홋카이도에서 맞는 두 번째 가을, 바람은 악보의 전조(轉調)처럼 갑자기 다가왔다. 따스했던 여름의 음표들이 차갑고 매서운 단조로 바뀌었다. 온도계의 숫자, 등을 휘감는 한기, 구름장의 두께, 나뭇잎의 색, 일출과 일몰 시각이 급히 방향을 틀었다.

 

아침의 거리엔 낙엽을 쓸어 담는 빗자루 소리가 담기기 시작했다. 바스러진 단풍잎 내음이 골목을 메웠다. 이 계절이 만들어낸 감각이 폐부에 닿으면 너른 들판이 떠올랐다. 불현듯 기름지고 푹신한 흙을 갈망했다. 햇것들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였다. 속이 꽉 찬 곡식과 싱싱한 과일, 채소 따위의 알맹이를 한가득 집어 담는 상상을 했다.

 

가을엔 들판으로 가야 한다. 오비히로, 나는 자꾸만 그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기차를 탔다. 다섯 량짜리 열차가 숲을 뚫고 달렸다. 스쳐 가는 풍경이 못내 아쉬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숲은 뒤돌아 보지 않았다.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잎을 떨구어 내려 분주했다. 얼마전까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던 나무들이었다. 기차가 최고 속도를 낼 무렵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홍차 티백이 담긴 뜨거운 물처럼 물들어 갔다. 더는 색을 빼낼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붉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 땅거미가 졌다. 날이 추워지는 만큼 일찍이 찾아드는 어둠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창밖이 잘 보이도록 눈 위로 두 손을 둥글게 말아 형광등 빛을 가렸다. 얕게 머문 꿈결에서 기억 속으로 멀어져 가는 것들에게 인사했다. 나무에 헐겁게 꿰어진 잎사귀들이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억하는 산책길 - 미도리가오카 공원

녹색 언덕이라는 이름(미도리가오카)을 가진 공원을 걸었다. 하늘은 높았고, 풀과 나무는 낮게 수런거렸다. 물 반짝이는 호숫가에선 오리들이 고개를 파묻고 낮잠을 잤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엔 아주 가끔 몇 명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빛과 고요가 어우러지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빚어냈다. 시간은 호숫물처럼 천천히, 빛을 내며 흘렀다. 나는 북쪽 마을의 커다란 공원을 거니는 것으로 올해의 가을에 밑줄을 그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보이는 것들은 곧 소멸했다. 모든 것을 낱낱이, 생생히,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다.

오비히로의 가을, 그곳으로 가고 싶어
오비히로의 가을, 그곳으로 가고 싶어

바야흐로 기억을 부르는 계절이었다. 불현듯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무작정 ‘홋카이도에서 살아 보자’는 말과 정말로 ‘살기 위해 해야 했던’ 행위는 많은 게 달랐다. 낯설고 서툰 것은 여행이라면 즐거웠지만, 끝없는 일상에서는 서러웠다. 아무런 연고도, 툭 터놓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한 해의 반은 춥기만 한 북쪽 섬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지금은 그때의 불투명함과 조바심이 생경하다. 가을이 끝날 무렵부터 나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당장 안 되는 것은 내려놓고, 실패로 돌아온 일은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는 생각이 문득 찾아왔을 무렵이었다.

기억하는 산책길 - 마나베 정원

마나베 정원을 찾은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모든 소리와 감각은 태양을 통해 느껴졌다. 각진 모양이 각기 다른 나무 그림자가 발걸음에 채였다. 듬직한 버드나무에 달린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오두막이 나무 둥치 사이에 꼭 맞게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입술로 붙는 머리카락도 떼지 않은 채 햇빛이 갓 구워낸 감각을 느꼈다. 자작자작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와 멀리서 아이들이 뛰노는 음성이 귓가에 따뜻하게 서성였다.

 

정원에 딸린 야외 카페에 앉아 게으름을 부렸다. 정오를 알리는 오르간 벨 소리가 울렸다. 다람쥐가 도토리 껍질을 아작아작 씹어 먹고, 딱따구리가 나무 몸통을 잰 몸놀림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컵 받침과 커피잔이 맞부딪히는 소리에 녀석들이 높이 달아났다. 시간이 데칼코마니처럼 뭉개진다. 문득, 소리가 사라진다. 세상 모든 구멍에 코르크 마개가 끼워진 것 같다. 익숙한 단어를 낯선 사전에서 찾아보고 새삼스러워하듯, 시간이 팔락팔락 얇은 책장 사이로 펼쳐진다. 정원의 빈 의자에 이 세상을 떠난 존재들이 다녀간 기분이 들었다.

오비히로의 가을, 그곳으로 가고 싶어

걷고, 달렸다. 그리고 기억했다. 평원의 검은 흙 속으로 내가 낸 발자국들이 흩어졌다.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새긴 발자국들이 따라온 곳은 종내 지금의 나였다. 여정의 마지막 날, 열꽃처럼 터졌던 단풍이 가을비에 반쯤 졌다. 영원을 소망하는 계절이었다. 언제까지나 비단처럼 물든 색색 빛깔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영원을 실패하는 계절이었다. 삭은 열매는 흙으로 돌려보내듯, 되지 않는 게 있다면 내려놓아야 했다. 모든 게 얼어붙기 전, 우리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이었다. 10월, 홋카이도의 산간엔 첫눈이 내렸다.

오비히로의 가을, 그곳으로 가고 싶어

자전거 대여, 자전거 전용 도로

토카치 지역 관광 스팟은 자동차나 버스 패키지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미도리가오카 공원과 마나베 정원은 자전거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JR 오비히로역 동관(東館) 2층의 관광 안내 센터에서 대여할 수 있다. 오비히로 강 옆을 달릴 수 있는 자전거 전용 도로를 다녀오는 것도 좋다. 관광안내센터에서 배포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한적하고 광활한 평원의 정취와 함께 미니골프나 축구 등을 즐기는 오비히로 시민들의 여가 생활도 엿볼 수 있다. 한 시간에 100엔. 오전 9시 30분 ~ 오후 5시 30분 운영.

 

오비히로의 온천 (http://www.tokachigawa.net/korean/index.html)

토카치가와 온천에 호텔이 밀집해 있다. 인터넷으로 예약 가능하며, 당일치기 플랜도 있다. 오비히로 역에서 차량으로 25분 소요. 스이코우엔(水光園) 온천은 오비히로 역에서 택시로 10분 거리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매끈한 자연 온천수를 노천탕에서 즐길 수 있다.

글ㆍ사진 | 송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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