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유황빛으로 별은 빛나건만

[여행]by 예스24 채널예스

스물일곱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된 남자는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평생 39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고흐는 4개 국어에 능통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지식인이었으며, 정말 그림에 미쳐버린 천재 화가였다. 그가 파리에서 아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일본미술에 심취했던 그에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아를의 햇빛이 일본과 비슷하다’는 말을 한 다음이었다. 물론 궁핍하고 피폐해진 파리 생활과 화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이 작용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를에서의 생활도 나아진 것은 없었다.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겨우 생활을 하면서도 캔버스 가득 아를의 태양을 칠했고, 밤에는 압생트라는 싸구려 술을 마시며 아를의 별을 스케치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며 또는 고갱과 함께 다녔을 길을 따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니 로마 시대에 지어진 커다란 원형경기장이 보였다. 경기장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커다란 몸집을 웅크리고 앉은 것처럼 보였다. 약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는 부족하지만, 경기장에는 무려 60여 개의 출입문이 있어 과거 이 건물을 바라본 사람들이 느꼈을 장대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를은 이미 오래전부터 번성한 도시였다.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며 각지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던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고 기원전 30년경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때 포룸, 극장, 온천, 광장, 원형경기장이 만들어졌다. 그 후 야만족의 침입 등으로 잠시 쇠퇴의 길을 걷다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황제가 제국을 순회하며 머무르는 도시가 되면서 다시 영광을 되찾았다.

창백한 유황빛으로 별은 빛나건만

역사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품은 아를의 콜로세움

흥망의 길을 걷었지만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어 아를에 있는 유적들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고흐가 아를에 살았을 때도 원형경기장은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했다. 특히 이 경기장은 부활절 축제 기간에 열리는 페리아 때 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데 기간에는 밤낮으로 도시가 축제의 물결에 휩싸이고 특히 중요한 행사 가운데 하나인 투우가 이 원형경기장에서 열린다. 고흐가 살았던 때에도 투우가 열렸으며 그는 이 투우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그린 <구경꾼들>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원형경기장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로마 시대의 극장이 나온다. 이미 기원전 12년경에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극장은 3층으로 지어졌고 약 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2층만 남아 있고 여기저기 허물어진 잔해들이 예전의 영광을 보여줄 뿐이라 지나가면서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이 극장에는 원래 약 100여 개의 돌기둥이 있었으나, 나중에 생 트로핌 성당을 지을 때 가져다 썼다고 한다. 바로 근처에 생 트로핌 성당이 있었다. 프랑스인을 가리키는 ‘골족’의 사도로 불리던 아를의 주교에 바쳐진 건물로 정문이 특히 유명하다. 정문 위쪽의 중심에 최후의 심판을 새겨넣어 정교한 조각과 장식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성당 바로 옆에 같은 이름의 성 트로핌 수도원이 있다. 로마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사각형 마당과 정원을 돌기둥이 둘러싸고 있다.

 

수도원 바로 앞에는 레뷔블리크 광장이 있다. 원래는 로마의 온천으로 개발되었던 곳을 광장으로 만든 것이라는데 특이하게도 광장의 중앙에 높은 오벨리스크가 하늘로 솟아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17세기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인근 로마 유적지에서 이리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분주한 여행의 시기가 아니기도 하고 평일 낮이라 한적한 광장에는 노인들이 몇 명 있는 정도였다.

 

광장에서 서쪽으로 골목을 조금만 걸으면 고흐가 발작을 일으켜 입원한 정신병원인 에스파스 반 고흐가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예전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마당에는 고흐가 그린 병원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데 그림과 실제 풍경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실제 그림 속 풍경과 같은 위치는 2층으로 올라가서 봐야 한다. 볕이 잘 드는 기둥에 기대 그림을 그리는 여행자의 모습에서 고흐가 병원 정원에서 스케치하고 붓을 들었을 모습을 떠올렸다. 이 정신병원을 이야기하면서 고갱을 빼놓을 수 없다. 1888년 고갱은 아를을 찾아 반 고흐를 들뜨게 했지만 10주도 채 안 되는 그들의 동거는 심한 다툼과 자신의 귀를 자르는 고흐의 유명한 일화만을 남기고 막을 내린다.

 

여름엔 40도의 날씨가 이어지기에 고스란히 햇볕을 견디며 걸어 다니기 힘들지만, 고흐의 그림처럼 소용돌이치는 자연과 들판을 가득 메운 해바라기, 햇빛을 담은 화려한 색채를 즐기기엔 제격이다. 또 고흐 의 표현대로 ‘창백한 유황빛으로 반짝인다.’는 아를의 태양과 별이 쏟아지는 밤의 론 강은 고흐의 자취를 따라서 온 여행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프로방스의 바람인 미스트랄로 인해 고흐의 그림 속 자연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그려졌다고 말한다. 실제 바람이 부는 계절의 풍경은 일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또 어떤 이는 그가 환각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반 고흐의 그림 속 실제 풍경을 아를에서 직접 대면한 사람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은 고흐의 정신이 누구보다 맑았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창백한 유황빛으로 별은 빛나건만

아를의 태양과 별이 쏟아지는 밤의 론 강

론 강을 둘러보고 다시 고흐의 밤의 카페로 갔다. 낡고 빛바랜 붉은색이 많이 쓰인 카페 내부는 쓸쓸했다. 점원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커피 한잔을 시켜두고 이 층과 카페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고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흐가 수시로 찾아왔을 때도 그저 평범한 동네 카페였거나 술집이었을 그곳에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억지스럽게 붙여 놓은 조잡한 고흐의 그림 포스터가 여기저기 벽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과거 유명한 인물이나 영화 등의 행적을 따라 찾은 여행은 실망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책에서 읽으며 느낀 감동과 상상, 스크린의 멋진 영상의 순간을 기대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조작된 상상이고 영상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직면하고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 안에 아름답게 저장된 영상을 다시 실제 위에 얹어 더 아름답게 구성하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를은 언제고 다시 오고 싶은 도시다. 고흐와 관련 없이도 말이다.

무언가를 발견하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으려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여행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글ㆍ사진 | 배종훈

 


 

창백한 유황빛으로 별은 빛나건만
이젠 흔들리지 않아

배종훈 저 | 더블북

 

책에는 저자가 직접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도시들 풍경과 역사, 사유가 노트북 자판기를 꾹꾹 두드려 쓰였으며 원색적인 색감의 붓칠로 그림들이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여행지의 파란 하늘을 모티브로 연신 눌러대는 셔터 소리가 들리는 듯한 풍광 사진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텅 빈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다. [도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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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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