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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오늘날에 돌아보는 김재규의 삶

by예스24 채널예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진실은 무엇인가?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김재규는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2020.11.10)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자 대한민국 근현대 인물 연구의 권위자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10·26 사건’이 아니라 ‘김재규’라는 인물과 그의 생애에 초점을 맞춰 김재규와 10·26 사건을 들려준다. 김재규의 삶 전체를 조명하면서, 그가 걸었던 권력의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와 함께 알려지지 않던 이력도 추적한다. 어용사학자들을 통해 ‘사육신’ 중에서 유응부 대신 김재규의 조상인 김문기를 사육신의 반열에 올리고자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다. 반면 중앙정보부장 등 고위직에 있으면서 축하 화환도 돌려보낼 만큼 청렴결백한 면과, 독립운동가 출신인 장준하 선생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와 함께 『김재규 장군 평전』에는 대법원 판사 14명 중 소수 의견을 낸 판사 4명의 소수의견과, 구명을 위한 건의문과 탄원서, 그리고 김재규의 마지막 유언 등이 담겨 있다. 


김재규 장군 평전 출간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김재규 평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김재규 장군이 10·26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이 집행된 지 40년이 지났으나 지금까지도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김재규 장군이 사망한 지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김재규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쓴 평전이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또 객관적인 시각으로 썼다는 점이 다른 책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재규 장군’이라는 호칭이 눈에 띕니다. 왜 ‘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였나요?


김재규는 25년 이상을 군인으로 복무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장군입니다. 또 김재규 본인이 사형을 앞두고 가족에게 몇 가지 유언을 남겼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후에 ‘장군’으로 호칭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와 박정희는 어떤 관계였나요?


먼저, 두 사람이 모두 경상북도 선산군 출신입니다.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서 동기생(2기)으로 처음 만났지요. 1961년에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킨 뒤 두 사람의 관계가 한때 소원했으나,김재규는 박정희에 의해 호남비료회사 사장·6사단장·보안사령관·3군단장·건설부장관·유정회의원·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두루 지내게 됩니다.


10·26 사건 이전에도 김재규가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언제 시도했나요?


김재규가 처음에는 박정희의 정치행위를 순수하게 보고 그를 도와줬어요. 그런데 1972년에 유신쿠데타를 통해 영구집권체제를 만든 것을 보고, “애국심이 집권욕에 못 미치고 있다”라고 판단하면서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헌정질서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사심(私心)을 버리고 공심(公心)으로 돌아가 그를 제거하고자 시도했지요. 


첫 번째 시도는 김재규가 3군단장이던 시절에 박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했을 때 그를 연금시켜 대통령직에서 하야시키려고 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했어요. 두 번째는 건설부장관 임명식장에서 권총으로 박 대통령을 사살하고 자신도 자결하려고 했으나 “인정이 깊어서” 취소했지요. 이때는 유서까지 써놓았다가 나중에 모두 소각했다고 합니다.


대법원 판사 중 소수의견으로 김재규의 판결에 반대의견을 냈는데, 소수의견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소수 의견은 주로 10·26 사건이 단순살인사건이지 내란음모는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궁정동 현장에서 박정희와 차지철(경호실장)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니까, 어디까지나 ‘단순살인사건’이라는 주장이지요. ‘내란음모’라면 다수인명을 동원하여 헌법기관을 장악하거나 시위·폭동의 사태를 벌여야 하는데, 10·26 사건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재규에게 빚을 많이 졌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정희 유신체제에서는 ‘전 국민의 죄수화’, ‘전 국토의 감옥화’란 말이 나올 만큼 수많은 학생·노동자·문화인·정치인 등이 감옥에 가고 의문사를 당하는 등 민주화를 위해 희생했으나 유신체제는 갈수록 더욱 강고해졌지요. 부마항쟁이 일어나도 유신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200만~300만 명이 죽었는데, 우리도 반정부 폭도를 그렇게 처단하면 조용해진다고 폭언하고, 박정희도 동조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10·26 사건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캄보디아와 유사한 유혈사태가 일어났을지 모르지요.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아서 제거함으로써 엄청난 유혈사태를 막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 국민은 김재규에게 많은 빚을 진 거죠.


김재규의 재심이 신청되었습니다. 그의 재심과 복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재규 장군의 재판은 헌법에 규정된 ‘법관의 양심과 법률’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정치적 사생아’라 불리는 신군부의 전두환 세력이 재판을 주도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요. 따라서 유족이 재심을 신청했고, ‘사법농단’의 상징적인 이 사건은 마땅히 재심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 수천 년 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폭군방벌사상’이라는 사상이 전해옵니다. 이는 백성(국민)의 뜻에 거역하면서 폭정을 일삼는 군주(위정자)는 시정할 것을 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제거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김재규 장군의 ‘10·26 거사’는 이런 의미에서 시민저항권 사상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권이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김상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 제주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 등을 맡고 있다.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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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