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남한강 정취 속으로…양평 물소리길
전철 타고 가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
양평 남한강변 가을 정취 [사진/전수영 기자] |
남한강을 따라 나 있는 양평 물소리길의 늦가을은 깊고 그윽했다.
물소리길은 국토의 젖줄인 남한강의 맑고 푸른 정취에 흠뻑 젖게 한다. 감염병 사태 장기화에 지친 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양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마침내 만나 한강의 본류를 이루면서 절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경관이 수려해 오래전부터 '경기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1,157m)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가경을 이룬다.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용문산에는 천년고찰 용문사가 있다. 1천100년 이상 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올해 가을에도 그 넓은 품을 눈이 부시도록 노랗게 물들였다.
2천만 수도권 주민의 생명수인 한강의 소리를 들으려면 양평 물소리길을 가라.
물소리길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맑은 물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느낄 수 있게 조성된 도보여행 길이다.
수도권 전철인 경의중앙선의 양평 구간에 있는 역과 역을 이어 걷는 길이다. 6개 코스 모두 전철역에서 시작해 전철역에서 끝난다.
가령 1코스는 양수역이 시작점이고 신원역이 종착점이다. 6코스는 용문역에서 시작해 용문산관광지역에서 끝난다.
양강섬 부교 [사진/전수영 기자] |
수도권 주민이라면 주말에 자동차를 타지 않고도 전철로 방문해 걷기를 즐길 수 있다. 전철에서 내리면 물소리길이 시작되고, 물소리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전철을 타고 귀가하면 된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양평까지 전철로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주말에 운전 스트레스를 겪지 않고도 남한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물소리길의 매력이기도 하다.
물소리길 6개 코스는 하나같이 걷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1코스 문화유적길에는 한음 이덕형의 유적지와 몽양 여운형의 생가가 있다. 코스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1코스 가까이에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즉 양수리가 있다. 물과 꽃의 정원으로 불리는 '세미원'도 멀지 않다.
신원역∼국수역∼아신역으로 이어지는 2코스는 터널이 있는 기찻길이다. 폐철길과 옛 철길터널을 거니는 낭만은 남한강 감상에 얹히는 덤이다.
3코스 강변이야기길은 옥천냉면으로 유명한 옥천면, 뜬다리로 유명해진 양근섬을 지난다.
4코스 버드나무나루께길에는 벚꽃길, 양평해장국거리가 포함돼 있다.
5코스 흑천길은 남한강 물소리를 가장 많이 듣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남한강 지류인 흑천은 바닥 돌멩이들이 검은색이어서 물색이 검게 보인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6코스 용문산 은행나무길은 흑천을 따라 마을 길을 지나고 산을 두 번 넘는다.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길을 걸을 수 있다.
물소리길은 6개 코스가 끊김 없이 죽 이어진다. 총 56㎞다.
남한강 옆 갈산공원 [사진/전수영 기자] |
우리는 풍광이 탁월한 3코스와 4코스를 이어 걸었다.
3코스 중간 지점인 천주교양근성지에서 시작해 양근섬∼양근대교 북단∼양평교 북단∼전망대∼갈산공원∼벚꽃길까지 걸은 뒤 4코스 중간쯤인 현덕교 에서 여정을 마쳤다. 거리는 6∼7㎞쯤 되고,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하늘은 청명하고 높았으며, 햇살은 맑고 화사했다. 그러나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 비가 내린 다음 날이어서인지 바람이 무척 심하게 불었다. 골바람 이 부는 곳이나, 다리 위에서는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했다.
거센 바람을 받은 남한강 수면에는 마치 바다처럼 높은 파도가 일었다.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파도는 물결이 흘러가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치고 있었다. 어머니 품 같은 남한강이 격렬하게 요동하는 모습은 자연의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양근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요람 같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 도입기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던 곳이며, 천주교가 충청도, 전라도로 전파된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양근성지는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미사 외 시간에는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양근성지 [사진/전수영 기자] |
성지 맞은편에는 양평군 문화센터인 어울림센터 건립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옆에 물안개 공원이 있고 공원 언덕엔 고산정이라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고산정은 물안개 공원을 만들 때 남한강의 풍취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지어졌다. 용문산 지맥 끝자락에 위치했다.
양평의 진산인 용문산은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광주산맥에서도 큰 산이다. 고산정은 비록 근래 지어졌지만 세월이 흐른 후대에 남한강의 명소로 자리 잡을지 모를 일이다. 언덕 아래에는 황명걸의 시비가 있다.
지조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길은 양강섬으로 이어진다. 섬은 길이 약 100m의 뜬다리로 연결돼 있었다. 이 부교는 지난해 9월 공사를 시작해 올해 7월 완공됐다.
다리를 건너는데 발밑이 흔들거린다. 다리 완공 후 양강섬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이 더 늘었다고 한다.
공원처럼 조성된 양강섬에는 산책이나 운동하는 시민,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주민이 꽤 많았다.
무궁화동산도 조성돼 있다. '영원무궁토록 빛나 겨레의 환한 등불이 될 꽃'이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무궁화의 '무궁'은 순우리말이라는 설명이 푯말에 쓰여 있다.
4코스 창대 배수펌프장 아래 끊긴 흙길을 잇는 뜬다리 [사진/전수영 기자] |
물길이 아름다운 양평은 자전거 여행의 천국이기도 하다. 양강섬에서는 멀리 남한강 자전거길을 달리는 자전거인들이 보였다.
남한강 자전거길은 팔당역에서 충주댐까지 136㎞이다. 길은 팔당역에서 서울로, 충주에서는 부산으로 다시 이어진다. 비록 중간중간에 일반 도로를 거치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다.
씽! 휙! 쏜살같이 달려가는 자전거는 구석구석 아름다운 이 땅 순례의 꿈을 부풀린다.
국내 매장 중 가장 크다고 알려진 스타벅스가 양강섬 건너편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용문산 봉우리 중 하나인 백운봉이 파란 하늘을 이고 삼각산처럼 치솟은 게 인상적이다.
양강섬을 나오면 3코스는 양평역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양평역으로 가지 않고 남한강변을 따라 계속 걸었다. 200∼300m를 가면 길은 4코스와 연결된다.
양근삼거리라고 표시된 지점에는 이포보까지 14.4㎞임을 알리는 자전거길 이정표가 있다. 양평역 근처에서 매월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에 오일장이 선다는 사실을 알리는 푯말도 있었다.
강 건너에는 전원주택 단지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막바지를 지난 단풍과 갈색으로 변한 숲속에 집들이 폭 안긴 풍경이 이국적이고 평화로웠다.
길바닥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위한 거리 표시가 있다. 여주시 13.6㎞, 남양주시 20.1㎞였다. 이어 양근 나루터, 한강 하구로부터 103㎞ 지점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차례로 나왔다.
남한강을 찾은 겨울 철새 청둥오리 [사진/전수영 기자] |
길은 갈산공원으로 연결됐다. 갈산공원은 4코스 중에서도 특히 정겨운 곳이었다. 갈산공원 강변길에는 벚나무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벚꽃이 필 때는 그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꽃보다 억새'. 예기치 않게 길손을 반긴 것은 흐드러진 억새와 갈대였다.
공원 곳곳에 뭉텅이진 억새는 늦가을의 주인공이었다. 북쪽에서 날아온 청둥오리들은 어느새 강에 터를 잡아 겨울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다.
흑천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세워진 현덕교에서 우리 여정은 끝났다. 그렇지만 4코스는 현덕교∼신내해장국거리∼원덕역으로 이어진다.
해장국거리에는 옛날과 달리 해장국집이 많지 않다. 3∼4곳이 남아 있다. 전국 각지에서 양평해장국 집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양평에서는 해장국 식당 수가 감소하고 있나 보다.
바람 찬 겨울날, 남한강변을 말없이 걸었다면 뜨끈한 해장국 한 그릇에 내일을 위한 힘과 용기가 다시 솟구치지 않을까.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양평=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