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가 하늘 향해 나풀나풀…민둥산

전국 5대 억새 군락지의 명성에 걸맞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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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는 등산객들[사진/조보희 기자]

한반도의 가을은 무슨 색일까. 산하를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색이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 농심(農心)은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의 황금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일렁이는 억새 물결의 찬란한 은빛이라는 대답도 빠지지 않을 성싶다. 가을이면 잔털 모양의 하얀 이삭이 패는 억새는 한반도 전역에서 자란다.

◇ 전국 5대 억새 군락지

이 때문에 곳곳에 유명한 억새 군락지가 적지 않다. 강원도 정선 민둥산, 경남 창녕 화왕산, 경기도 포천 명성산, 경남 '영남알프스' 사자평고원, 전남 장흥 천관산은 전국 5대 억새 군락지로 꼽히기도 한다. 억새와 비슷한 종류인 갈대는 주로 고도가 낮은 물가에 서식하기 때문에 접근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산지에 형성된 억새밭은 적잖이 다리품을 팔아야 감상을 허락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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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정상으로 향한 길은 트레킹 코스로 제격이다.[사진/조보희 기자]

산 정상에 억새 군락지가 있는 민둥산이나 화왕산도 그렇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2시간 힘들게 오르는 수고를 치러야 바람 따라 물결치는 억새 무리가 이루어내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그저 주어지는 것보다 내 것을 내어주고 얻는 것이 주는 기쁨은 더 짜릿하기 마련인가. 정상에서 즐기는 억새밭의 풍광은 더 아름답게 빛난다.

◇ 마음을 높이 날려 올릴 듯…하늘하늘 은빛 물결

민둥산은 해발 1,118m에 이른다. 산 정상 부근에 나무가 없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정상 주변에 나무가 사라진 것은 산불이 여러 차례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상부에 약 20만 평에 이르는 억새밭이 형성돼 있다. 산불이 일어난 뒤에 억새 풀이 산을 덮는 데 걸린 기간은 약 20년이다.


다른 지역에서 억새밭이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하면 이는 매우 긴 편이다. 이처럼 긴 시간이 걸린 것은 억새밭이 위치한 곳의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고 바람이 세기 때문이다. 석회암질 토양, 건조한 기후도 나무가 자라기에 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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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암 지형인 돌리네가 보인다.[사진/조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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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은 억새 숲으로 유명하지만 석회암 지대에 나타나는 돌리네(doline)가 발달한 카르스트 지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카르스트란 석회암 내 탄산칼슘이 빗물에 용해돼 나타나는 침하 지형이다. 석회암이 지표에서 녹으면 땅이 주로 원 모양을 만들면서 가운데가 움푹 꺼지게 되는데, 이를 돌리네라고 한다. 구덩이 형태의 돌리네는 대개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데 빗물은 이 구멍으로 빠져나가 지하로 흘러간다.


민둥산 일대에는 돌리네가 12개 있다. 억새밭 중간에 생성된 커다란 돌리네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산 중턱에 있는 '발구덕'이라는 마을 이름은 8개의 돌리네를 뜻하는 '팔구덕'에서 유래했다. 부드럽게 넘실대는 소박한 억새가 화려한 꽃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온유, 평화, 단순을 향한 갈망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풀나풀 흔들리는 억새 풀들이 사람의 마음까지 하늘을 향해 날려 올릴 듯 경쾌했다. 그런 억새 무리가 그리워 민둥산을 찾은 탐방객은 평일인데도 많았다. 올해 가을에는 억새 무리가 빚어내는 자연미를 체험하고 싶다는 열망에 작정하고 길을 나선 것 같았다. 민둥산 억새밭이 유명해지자 정선군에서는 9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억새 축제를 연다. 50여 일에 이르는 축제 기간에 산을 찾는 탐방객은 20만 명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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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등산객들[사진/조보희 기자]

◇ 상쾌한 트레킹 코스

민둥산은 억새 감상이라는 특별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탐방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1,100m 넘는 높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경사가 완만한 곳으로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어 쉬엄쉬엄 올라가면 '등린이'(등산 초보자)도 도전해볼 만하다.


4개의 등산 코스 중 증산초등학교에서 시작하는 1코스는 비교적 완만했다. 거리는 편도 3.2㎞이고 왕복에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등산로 초중반에는 오르막이 계속되지만 7부 능선 이상은 완만한 구릉지대이다.


마주 오는 탐방객을 배려하지 않고는 지나가기 쉽지 않을 정도로 좁은 오솔길 구간이 많았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숲은 적당한 그늘을 이루고, 부드럽고 촉촉한 흙길은 억새밭을 찾아가는 행로 자체를 힐링의 여정으로 만든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맑고 다사로운 가을빛은 쉼 없이 흐르는 계절을 붙잡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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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밭 속에서 도시락을 먹는 등산객들[사진/조보희 기자]

능선에 도달하면 사방으로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이어지는 경치가 도시 생활에 시달린 현대인의 가슴을 트이게 한다. 정상부에 큰 목장처럼 펼쳐진 억새밭 속으로 헤엄치듯 들어가면 나와 세상 사이에는 산과 억새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정상에 서면 풍력발전소가 있는 매봉산(1,303m), 백두대간 야생화 군락지로 유명한 함백산(1,573m), 하이원리조트가 멀리서 병풍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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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에 있는 거룻배 [사진/조보희 기자]

◇ 아우라지와 한반도 지형

태백, 영월, 평창, 강릉, 동해 등과 접한 정선은 면적으로 보면 가장 큰 군 중에 속한다.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렸던 탄전 도시였다. 석회석 매장량은 전국 매장량의 25%에 해당하는 100억t에 이른다. 태백산맥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해발 1천m 이상의 명산이 22개나 된다.


높은 산들은 천혜의 경관을 연출하지만 좁은 농토와 척박한 자연환경의 원인이기도 하다. 옛 정선의 고단하고 애달픈 삶에서 비롯된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유산이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인 정선아리랑이다. 700∼800수에 이르는 정선아리랑 중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로 시작하는 애정 편의 무대가 아우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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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에 있는 돌다리.[사진/조보희 기자]

아우라지는 평창 발왕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송천, 정선 임계와 태백 대덕산에 시작하는 골지천이 합류하여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장마에 불어난 강물로 인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청춘 남녀의 전설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경복궁 중수에 쓰기 위해 강원도에서 벌목한 목재를 운반하던 뗏목이 출발하던 곳도 아우라지였다. 송천과 골지천이 아우라지에서 만나 큰 강을 이루자 수운이 가능해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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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방치스카이워크[사진/조보희 기자]

정선 오일장은 더덕, 도라지, 곤드레, 칡 등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가 풍부한 시골장으로 유명하다. 장날에는 서울 청량리역에서 정선으로 출발하는 정선 오일장 열차가 운행된다. 바닥이 투명한 유리 전망대 위에서 한반도 지형을 닮은 동강 변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병방치 스카이워크에서는 정선의 박진감 넘치는 산세를 실감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현경숙 기자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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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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