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여행]by 연합뉴스

밀양아리랑의 고향에서 나의 임을 그리며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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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랜드마크 영남루 [사진/이승우 기자]

(밀양=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밀양아리랑'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전통 민요이자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과 더불어 삼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예술사전에 따르면 가락은 경기 민요에서 파생했으나 노랫말은 밀양 지역 명승과 인물을 경상 방언으로 묘사한 것들이어서 토속 전래민요라기보다 1900년 즈음 생겨난 '신민요'로 분류된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아리랑', '광복군 아리랑'으로 개사해 항일운동 노래로 불렸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 월랑이 눈에 띄는 '삼대 누각' 영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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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내부와 11세 소년이 쓴 '영남제일루' 현판 [사진/이승우 기자]

밀양아리랑의 사연이 깃든 그곳, 경남 밀양을 가을 내음을 헤치며 찾아갔다. 밀양아리랑 사설에는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오네'라는 대목이 있다. 그 '영남루'에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영남루는 국내 3대 누각 중 하나이자 조선 후기 대표 목조 건축물(보물 147호)로도 평가받는다. 절벽 위에 우뚝 솟아 밀양강을 내려다보는 자태가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남성미와 여성미가 동시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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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와 부속건물 침류각을 연결하는 계단 '월랑'(月廊) [사진/이승우 기자]

영남루는 작은 부속 건물 2개 동을 옆에 낀 독특한 구조다. 가운데 영남루가 있고, 좌우 날개에 행랑인 침류각과 능파당을 거느렸다. 가장 눈에 띈 건 본관인 영남루와 부속물 침류각을 연결하는, 지붕 있는 계단형 회랑인 '월랑'(月廊)이다. 문화재나 건축 양식에 과문하지만 이런 건축 형태를 직접 본 게 처음이라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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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의 웅장한 자태 [사진/이승우 기자]

고려 공민왕 시절인 1365년 지은 이래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됐다 개창됐다. 현 모습은 1844년 당시 이인재 밀양 부사가 중건한 것이다. 신을 벗고 누각 위에 올라보니 굽이도는 밀양강은 물론 밀양 시내와 주변 산들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누각 이름을 알리는 현판 두 점은 1843년 쓴 것인데, 여전히 당당한 위세를 풍기며 걸려있다. 더 놀라운 건 당시 열한 살이던 이 부사 장남과 일곱 살이던 차남이 현판 글귀를 썼다는 사실이다. 장남 증석은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판을, 차남 현석은 '영남루'(嶺南樓) 현판을 각각 남겼다. 코흘리개 어린이들이 쓴 글씨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성숙한 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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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 영남루 [밀양시 제공]

대낮에 답사했지만 사실 영남루 백미는 야경이라고 한다. 강 건너에서 불 켜진 영남루를 바라보는 풍경도 좋고, 영남루 쪽에서 강과 마을을 조망하는 것 역시 절경이라고 시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 밀양아리랑과 애수의 소야곡

영남루 터 후문으로 나가면 밀양아리랑 기념비가 기다린다. 가사도 적혀있다. 비 옆에 설치된 버튼을 한 번 눌러봤다. 밀양아리랑 민요가 실제 흘러나온다. '날 좀 보소~'. 정든 임을 향한 화자의 애절한 마음이 사투리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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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의 흉상과 노래비 [사진/이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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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바로 옆에는, 애잔한 선율로 우리 국민의 애환을 어루만졌던 레전드 작곡가 박시춘의 옛집이 있다. '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민초들 사이에서 밀양아리랑 못지않게 많이 불린 노래들을 낳은 거장의 흔적이 여기 남은 건 우연의 일치일까. 특히 그가 6·25 전쟁 기간 작곡한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여 잘 자라'는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지키기 어려운 잔혹한 전쟁통에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게 해준 정신적 영양제였다. 불멸의 히트곡들을 포함해 무려 3천여 곡의 대중가요를 남긴 박시춘은 K팝의 '뿌리'로 평가받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만든 노래 네 곡 탓에 좌우간 친일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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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작곡가 박시춘의 옛집 [사진/이승우 기자]

진흙과 볏짚 등으로 지은 초가집에는 방 하나와 부뚜막만 보였다. 단출하다. 문득 '사람 사는 데 이것 이상 더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도 비슷한 사유의 소산일지 모르겠다. 마당에는 박시춘의 흉상과 '애수의 소야곡' 악보를 새긴 노래비가 보였다. 고요한 산밑 노래비에선 고인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 인생은 유한하고 정치 이념은 유통 기간이 있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떠올리게 했다.

◇ 아이와 함께라면 '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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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대축제 공연 [밀양시 제공]

'밀양아리랑'은 밀양을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다. 지난 9월 말 예순네 번째 연례행사로 열렸던 지역 축제 이름은 '밀양아리랑대축제'이다. 가장 큰 시장 이름은 '밀양아리랑시장'이고 놀이공원은 '밀양아리랑대공원'이다. 가요제, 캠핑장 이름도 어김없이 밀양아리랑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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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 야경 [밀양시 제공]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2020년 5월 개관한 '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였다. 아리랑과 천문대라….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단어의 조합은 고색창연한 전통과 최첨단 과학의 조화를 추구하는 듯했다. 별을 보려고 어두운 밤 이곳을 찾았다. '국내 유일 외계행성과 외계 생명에 특화된 천문대'라고 자부하는 장소다. 천문대 관계자는 "세계 최초 음성인식 제어시스템이 설치된 70cm 반사망원경을 갖췄고, 해설자와 관객의 쌍방향 소통을 처음 시도한 천체투영관이 있다"고 자랑했다. 천장을 스크린 돔으로 둘러싼 천체투영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과거 미국 체류 시절 자주 들렀던 '모어헤드 천문대'의 우주 쇼에 뒤지지 않았다. 옥상에 있는 천체망원경으로 별과 별자리도 관측했다. 직접 본 토성 띠가 신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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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세운 의열기념관 [사진/이승우 기자]

밀양아리랑시장 인근에는 항일 운동을 주제로 개천을 따라 조성한 거리가 있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다. 당시 밀양 출신 독립투사의 활동상을 형상화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고 태극기들이 곳곳에 나부낀다. 논란 속 인물인 약산 김원봉도 이곳 출신이다. 이 거리에 있는 김원봉 생가터에 2018년 3월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이 들어섰다. 의열이란 명칭은 항일 무장 투쟁 조직인 의열단을 그가 이끈 사실을 기념한다. 김원봉은 해방 후인 1948년 월북해 인척인 김두봉과 더불어 북한 정권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공로로 최고인민회의 초대 대의원에 이어 핵심 각료인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6·25 남침 때 전쟁을 지휘한 내각에서 일하며 훈장도 받았으나 김일성의 친중파 숙청 작업 때 김두봉과 함께 제거됐다.

◇ 밀양의 3대 신비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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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3대 신비 중 하나인 얼음골 [밀양시 제공]

밀양에 갔다면 '3대 신비'로 불리는 여행지들을 빼놓을 수 없다. 밀양 3대 신비란 얼음골, 표충비, 그리고 만어사 경석을 지칭하는 말이다.


얼음골 계곡은 정말 신기한 곳이다. 여름 삼복더위에 고드름이 얼고, 겨울 혹한에는 더운 김이 올라온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듯하다. 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m 지점에 자리한 이 돌밭 계곡에는 매년 6월 중순부터 바위 틈새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해 더워질수록 얼음양이 증가한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얼음이 녹기 시작해 겨울에는 바위 틈새 물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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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흘러내리는 표충비 [밀양시 제공]

'땀 흘리는 비석'으로 불리는 표충비는 조선 영조 18년(1742년) 표충사에 세운 거대한 비석이다. 사명대사의 5대 법손 남붕선사가 경산에서 가져온 오석(烏石)에 사명대사의 일생 행적과 임란 당시 구국 충절을 찬양한 내용 등을 새겼다. 이따금 비석 위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두고 불교도와 지역민들은 사명대사의 영험으로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비석 위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신성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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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소리가 난다는 만어사 경석 [밀양시 제공]

만어사 앞에는 물고기 형상의 돌들이 널려 장관을 이루는데, 이 돌들을 두드리면 쇳소리, 또는 종소리가 난다고 해서 경석이라고 칭했다. 절에서는 이 돌들이 부처를 향해 일제히 엎드린 물고기들이라고 주장한다. 동해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호젓한 아리랑의 고장을 돌아보며 문득 멀리 떨어진 임이 생각났다. 방방곡곡 모든 고을의 아리랑은 임을 그리워하는 연가(戀歌)다. 이 가을, 펜에 잉크를 묻혀 나의 임에게 편지라도 띄워볼까.

◇ 밀양 아리랑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 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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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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