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여기 어때] 삼국 격전의 현장, 온달산성

by연합뉴스

원형 잘 보존돼…남한강과 소백산맥을 품은 수려한 경관

연합뉴스

온달산성 북쪽 성벽. 오른쪽에 수구가 보인다. [사진/조보희 기자]

(단양=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국은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산성이 많다. 그중에서도 원형이 잘 남아있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온달산성이다.


'바보' 온달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온달산성은 고구려·신라·백제가 치열한 영토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격전장이다.

휘돌아 가는 남한강과 소백산맥 줄기가 한눈에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다. 산자락은 골짜기를 끼고 있고, 계곡으로 모여든 물은 강이 되어 산과 산 사이를 흐른다. 산과 강이 어우러지면 멋진 풍광이 된다. 이것이 한국 지형과 자연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북미 그랜드캐니언이나 아프리카 대초원처럼 웅장하진 않지만, 숲과 물, 푸른 하늘과 바다가 조화를 이뤄 아늑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온 국민이 이름을 모르지 않을 온달산성도 그렇게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는 온달산성에 오르면 발밑으로 푸른 남한강이 크게 휘돌아 흐른다. 위로는 소백산맥 줄기가 첩첩으로 이어진다.


단양은 예부터 경치가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단양팔경'이 나온 연유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가자면 단양은 필자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약 10년 전과 비교할 때 적지 않은 변화들이 감지됐다. 산천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시가지가 번화해지고 활기차 보였다.


명승지만 해도 단양팔경에 '제2 단양팔경'이 더해져 있었다. 단양팔경은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일컫는다.


제2 단양팔경은 북벽, 금수산, 칠성암, 일광굴, 죽령폭포, 온달산성, 구봉팔문, 다리안산을 말한다.


새로 개발된 관광지 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단양강 잔도였다. 단양강변 절벽에 1.2㎞ 길이로 설치된 인공 데크 길이다.


벼랑 위를 걷는 듯한 스릴을 느끼게 하는 이 길은 인공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과 산을 눈으로 즐기고, 자연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길이었다.

연합뉴스

단양강 절벽에 데크로 이어진 잔도와 산 정상의 단양 스카이워크[사진/조보희 기자]

삼국시대부터 영남과 경기·충청을 연결했던 고갯길인 죽령옛길, 소백산의 장엄함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소백산자락길도 빼놓을 수 없는 보배로운 장소들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단양중에서도 온달산성에서 바라보는 국토는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감동을 준다. 강은 몇 번이나 온몸을 뒤틀어 흐르며 이 땅을 적신다.


끝없이 펼쳐지는 산봉우리들은 백두대간의 신성함을 새삼 일깨운다. 강과 산자락 사이에는 영춘면 인가들이 나지막이 앉아있다.


물론 온달산성은 경관 조망용 시설이 아니다. 남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강의 남안에 바짝 붙은 낭떠러지에 산성을 짓다 보니 자연히 주변 경관이 절경을 이루었다.


바퀴 달린 교통수단과 도로가 변변치 않았던 옛적에 수로와 배, 뗏목은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 수로 중에서도 큰 강은 요즘으로 치면 고속도로였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는 국경지대에 있는 이 고속도로, 즉 남한강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단양을 비롯해 충북지역은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던 접경 지역이어서 각축전이 심했다. 온달산성도 3국이 돌아가며 점령했던 곳이다.

삼국의 생사를 건 각축 현장

온달산성은 온달관광지에서 30분가량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간 곳에 있다.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전설을 주제로 조성된 온달관광지는 온달동굴, 온달전시관, 드라마세트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비탈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 데크 계단이 설치돼 있어 탐방이 수월했다. 남한강이 보이는 쪽이 아닌, 길의 왼쪽은 아찔한 낭떠러지다.

연합뉴스

온달산성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벌판 [사진/조보희 기자]

나무 계단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길이 매우 좁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아래 절벽이 현기증을 일으킬 때면 1천500여 년 전 군사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흘렸을 피와 산성을 쌓느라 쏟았을 땀이 더 애처롭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온달산성에 이르는 가파른 길은 선인들의 삶과 죽음, 생존의 현장이었다.


온달동굴은 강원 지역에 산재한 석회동굴 중 하나다. 한국에는 1천여 개의 자연 동굴이 있다. 그중 약 200개가 단양에 있다.


온달동굴은 단양에서 관람이 허용된 3∼4개 동굴 중 하나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온달동굴은 감염병 사태로 잠시 폐쇄돼 있었다. 이 동굴은 바닥에 물이 흘러 탐방하는 동안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추운 날인데도 온달관광지에는 관람객이 꽤 눈에 띄었다. '바람의 나라', '태왕사신기', 천추태후' 등 영화와 TV 드라마를 찍은 세트장은 조만간 촬영이 있을 예정인지 관련 인력과 차량이 작업 중이었다.


이곳을 찾은 탐방객들이 산성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촉박한 일정 때문일 것이다. 온달산성이 관광객들로부터 관심과 호기심을 끌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소득과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관광산업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지방자치단체마다 관광지 조성에 큰 힘을 쏟고 있다.


해외로 나가려는 관광객의 발길을 국내로 돌리려면 관광자원 개발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선행돼야 할 것이 이 땅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이어져 온 삶의 고귀함에 우리 자신이 눈뜨는 것이다.


그러면 관광과 탐방은 자연히 활발해질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관광자원이 아닐까.

연합뉴스

온달산성과 남한강 [사진/조보희 기자]

온달산성은 다리품을 팔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온달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 상주의 견훤산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산성으로 꼽힌다. 그중 온달산성은 주변 풍광이 멋질 뿐 아니라 산성 자체가 매우 아름답다.


튼튼하고 균형 있게 잘 만들어진 산성은 비록 군사용일지라도 미적 감성을 자극한다. 온달산성은 고대에 지어졌음에도 서쪽 구간 약 100m가 무너졌을 뿐 대체로 잘 보존돼 있다. 워낙 견고하게 잘 지어졌기 때문이다.


두께 5∼15㎝ 정도의 비교적 얇고,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성벽은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축조물이다. 성돌의 크기는 가로 70㎝, 세로 40㎝ 정도다.


온달산성은 해발고도 427m의 산 정상에 축조된 테뫼식 석성이다. 둘레는 683m로 크지 않다. 테뫼 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싼 성을 말한다.


동·남·북쪽의 문 3개 중 동문 쪽 성벽은 지형을 따라 곡선으로 돌출돼 있는데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양식이다.


북문에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내밀어 쌓은 치(稚)가 있다. 치는 성벽에 바짝 붙어 공격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만들었다.


온달산성의 지세는 남고북저다. 고도가 가장 낮은 북문 쪽에는 성안의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한 수구가 있다. 성안에 우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까지 유적 발굴단이 찾지는 못했다.


고대 설화를 통해 바보로 알려진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와 결혼한 고구려 장군이다.


고구려의 온달은 백제에 빼앗겼다가 다시 신라로 넘어간 죽령, 계립령 땅을 찾기 위해 아단성을 공격하다가 성 아래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연합뉴스

온달장군 동상 [사진/조보희 기자]

아단성은 서울 광나루 근처 아차산성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지금의 단양군 영춘면이라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다. 이에 따라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은 온달의 전사지로 간주된다.


영춘면에는 온달과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영춘면 상리 나루는 온달을 장사지냈던 곳으로 전해진다. 장례 때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으나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자 비로소 관이 들렸다는 전설이다.


온달산성은 정확한 축성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산성으로서 기능을 거의 상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시대라면 단양은 국토의 중심부다. 내륙 깊숙이 있는 산성은 방어용 요새로서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산성의 나라

우리나라에는 산성이 많다. 그래서 한국은 '산성의 나라'라고 불린다. 산이 많으니 산세를 이용한 산성이 군사시설로서 자연히 발달했다. 산의 절벽이나 경사면을 이용하면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난공불락의 기지를 구축할 수 있다.


지리적 요충지에 쌓은 산성은 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전술·전략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최악의 경우 농성만 해도 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위씨 조선 때부터 산성을 지은 것으로 나타난다.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부소산성 등 도읍지에 산성을 쌓았던 백제는 단연 산성의 왕국이었다. 고구려는 백제보다 더 일찍 산성을 쌓았다. 신라가 쌓은 산성도 많다. 3국 각축장이었던 충북 지방에는 다른 지역보다 산성이 많았다.

연합뉴스

성안에서 발견된 공격용 석환(둥근돌) [사진/조보희 기자]

고려, 조선 시대 들어서는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을 주로 보수해서 이용했다. 두 왕조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산이 아니라 해안가에 주로 진지를 구축했다.


산성의 발달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징에서 비롯됐다. 산성은 한민족이 면면히 이어온 저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몽골이 침략했을 때 산성에서 항쟁했고, 임진왜란 때 조선이 일본에 승리를 거둔 장소 중에는 산성이 많았다. 임란 때 조선 군대가 소중한 승리를 거둔 행주산성이 대표적이다.


현재 중부 이남에만 1천200여 개의 산성터가 남아 있다. 지난 1년 동안 이매진(imazine) 제작을 위해 방문했던 지역 중에서만도 예천, 상주, 문경, 괴산, 청양, 부산, 밀양 등에 산성터가 있었다.


혹시 동네 뒷산에 산성터가 없는지 눈여겨보자. 분명 멀지 않은 곳에 크고 작은 산성터가 있을 것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