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먼저' 사랑해서 슬픈 것

[푸드]by 김정훈

당신이 슬픈 건 더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다. 

‘먼저’ 사랑에 빠져서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의 첫 인상은 달콤하다. 실은 맵고, 짜고, 눈물 나게 쓰고, 심지어 썩어버리기까지 하는 알맹이를 감추고 있음에도 불변의 달콤함만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첫눈에 반하는 건 위험하다. 달콤함에 취해 오감을 상실해 버리고선 이런 환상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완전해. 이번 사랑은 황홀할거야. 우린 분명 그렇게 만들어 나갈 수 있어!’

 

공사다망한 연애과정을 거치며 천천히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적당한 불순물을 섞어가며 사랑의 정의를 완성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건 대단히 순결하고 고결하며 또 위대하기만 하다는 착각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 사랑의 에너지변화 (하향곡선을 그리는) 와 상대의 변심에 실망도 덜한 법이고.

 

그러므로 우린 맵고, 짜고, 쓰고, 썩어버릴 확률까지 존재하는 사랑의 다양한 실체를 천천히 관찰한 뒤 사랑의 맛을 정의 내려야 한다. 첫 눈에 반해 ‘먼저’ 사랑에 빠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먼저'

2층에 더 넓은 공간이 있는 캐주얼한 분위기의 피자집이다

나 역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신봉하던 때가 있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진 그랬다. 지금, 미진이와 처음 만난 이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미진이와의 이별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단 사실 때문이란 것을. 그러니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상대보다 먼저 사랑에 빠져버린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싶다. 더 많이 사랑해서 괴로운 게 아니라, 먼저 사랑에 빠졌으므로 더 힘든 이별과정을 겪는 거라고. 연애과정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다툼과 상대의 단점들을 떠올리며 이별을 받아들이려 해봐도, 첫눈에 반했을 때 당신을 마비시켰던 무결점 사랑의 달콤함이 너무나 가혹한 미련을 주는 거라고. 그 거대한 괴로움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면 본인이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속단하지말자고.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먼저'

먼저 도착한 건 그녀였지만 먼저 사랑에 빠진 건 나였다. 늦거나 빠르지 않고 두 사람이 동시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별도 역시.

나는 식어버린 피자를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 가게의 피자는 식어도 맛이 꽤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미진이와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이 사람이라면 식어도 맛있는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만들어 내버린, 가슴 전역을 드리운 거대한 허무함 역시 놀라운 속도로 걷혀버렸다. 그 중심에 환하게 빛을 발하는 미진이가 자리 잡고 말았다. 서로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 애썼던 수십 번의 싸움 속에서도, 냉정한 이별 후에도, 그 생생한 행복감은 희미해지질 않는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살고 있었다니, 왜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치지 않은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훔쳐보았던 진한 갈색의 눈동자와 적당한 숱의 속눈썹. 내게 말을 걸어오던 입술과 그녀의 말을 기다리며 한없이 두근거리던 내 심장 소리. 피자의 고소한 냄새 대신 내 후각을 감동시킨 그녀의 향기. 그 순간 떠올리게 된 사랑이라는 단어. 비로소 이 세상에 둘만 남게 된 것 같은 기분. 흑백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 유일하게 컬러를 갖고 있는 존재를 만난 기분, 사랑이라는 단어의 달콤함, 이 사람과 만들고 싶은 사랑에 대한 확신...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먼저'

알맞게 두껍고 바삭한 도우, 부드럽게 늘어나는 치즈, 감칠맛 나는 토마토소스와 풍미를 배가시켜주는 신선한 토마토조각, 적당히 짭짤한 햄, 식감을 살려주는 쇠고기와 양파, 피망, 올리브와 브로컬리까지. 밸런스가 완벽한 그런 피자. 그런 사람.

그렇게 황홀함을 주는 사람과 소개팅을 하게 된 건 다시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물론 그 기적이 영원한 기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소개팅으로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어려운 확률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그녀와 호감을 주고받고 연애를 시작하게 될 줄이야. 첫 만남의 센스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고 애프터 승낙을 받아냈을 때의 기쁨이 떠올랐다. 연애칼럼니스트도 그런 걱정을 하냐고? 연애칼럼니스트라 해서 모든 소개팅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곤란하다. 상대방의 호기심과 기대치를 상승시켜 놓으니까. 반해버린 한 여자 앞에선, 나는 그저 보통의 남자일 뿐이다. 

여성들은 보통의 남성들이 뛰어난 센스를 갖고 있길 바란다. 외모나 재력대신 센스로 사람을 판단하는 걸 미덕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외모나 재력보다 더 갖기 힘든 게 바로 센스다. 남자들은 늘 긴장한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첫 대화를 건네는 순간부터 센스파악테스트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개팅 장소 선정은 그 테스트의 절정이다. 고득점을 위해 여자지인에게 자문을 구할수록 어쩐지 더 혼란스러워진다. 무난하다 생각했던 파스타는 소개팅의 단골메뉴라 질린다며, 아주 잘생겼거나 특별히 재밌는 화술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엔 임팩트 없는 소개팅이 될 수 있단다. 편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삼겹살집은 어떠냐 물으면 상대방이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단다. 하... 그래서 평소에 가본 적 없는 색다르고 이국적인 레스토랑을 가려하니 뭘 시켜야 할지 몰라 버벅거릴 것 같고, 어디든 예약을 해야 하는데 요즘 유명 맛집들 중엔 주말 예약을 거부하는 곳이 또 많다. 그래서 소개팅 장소선정에서 센스를 발휘하는 방법을 물어오는 남자들이 상당히 많다.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먼저'

처음 방문하는 곳일 경우엔 메뉴판을 미리 숙지해놓는 게 좋다. 어설픈 것보단 능숙한 메뉴선택이 합격점수 획득에 도움이 된다.

다행히 나는 합격점을 받았었다. 미진이는 이 가게의 조명과 흘러나오던 음악을 맘에 들어 했다. 깔끔한 화장실과 편한 소파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피자와 맥주가 정말 맛있다며 즐거워했다. 흔한 파스타 가게에서 뻔한 얘기를 나누는 소개팅이 아니라 즐겁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합격의 비결은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눈여겨 본 덕택이다. 뮤직페스티벌 현장에서 실컷 흥이 나 있는 사진을 프로필로 해 놓은 그녀에겐, 조용하고 심심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보단 적당히 리듬감이 있는 피맥(피자+맥주)집에서의 만남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이건 꽤 유용한 추론법이다. 대화명과 프로필 사진의 분위기, 대화의 길이나 이모티콘을 쓰는 빈도 등으로 어느 정도의 취향은 드러나는 법이니까. 관찰에서 시작해서 공감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로 센스다.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린 이후에도 몇 차례 이곳을 방문했었는데,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건 200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첫 만남의 기분을 되살려보잔 귀여운 취지였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봤다. 둘이서 4가지 메뉴를 시켜놓고 깨끗이 먹어치웠던 사진들... 김빠진 웃음이 났다. 주문해 놓은 피자 한 판은 혼자 다 먹기엔 무리가 있었다. 서버를 불러 남은 피자를 포장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가 앉아 있었던 곳을 쳐다봤다. 어떤 과거는 현재보다 더 또렷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이 존재하는 위치는 절대로 현재가 아니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일 뿐이다. 내 앞에는 그녀가 없다. 나는 피자를 다 먹지 못했고, 남은 피자는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먹어서 소화시키든, 혹은 쓰레기통에 버려버리든지 말이다. 폰에 남아 있는 사진을 지울 때가 된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 30여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다음으로 지워야 할 사진들이 보였다. 두 번째 데이트 장소였던 연남동의 한 오뎅바에서 찍었던 사진들이다. 소개팅을 마친 우린 더 많은 대화를 나눴고 4일 뒤에 두 번째 데이트를 했다. 그 날 나는 미진이에게 고백을 했고, 키스를 했고, 함께 잠을 잤다. 그렇게 우린 아주 빠른 속도의 연애에 올라 타 버리고 말았다. 

이별소화레시피

먼저 사랑에 빠져 버린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한다. 그래서 상대가 변심했을 경우, 슬픔 이상의 억울함까지 보태어 더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불필요한 억하심정에 빠진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 상대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사실 상대방이 아닌 스스로의 만족에 좀 더 치우쳐 있었음을. 아무도 당신에게 사랑에 빠지라 명령하지 않았다. 사랑해달라 구걸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상대가 당신을 선택한 순간, 그 희열은 사실 상대방보다 당신이 더 많이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별 후 괜한 억울함과 배신감에 휘둘리진 않기로 하자. 즐길 거 다 즐겨놓고 이제 와서 억울해 봤자 본인만 손해다. 

맛집정보 : 잭슨피자 한남점 /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가길 26-1. 02-792-7374

201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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