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들의, 나쁜 남자를 위한 수다

[푸드]by 김정훈

모든 남자는 원래 나쁜 남자다.

단지 단 한사람에게만 무던히 착해지려 노력할 뿐.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미진이와 헤어지기 며칠 전 방문했던 카페다. 딱히 그녀가 그립진 않았지만 조금은 애틋한 기분이 들어 휴대폰의 사진첩을 열어봤다. 지울 수 없었던 사진들이 이젠 꽤 많이 사라진 상태다. 확실히 미련도 희미해졌다. 남아 있는 사진 속, 미진이와 함께 웃고 있는 나를 봐도 더는 슬프지 않다. ‘내가 다시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함도 사라지고 없다. 마치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슴에서 머리 쪽으로 옮겨간 느낌이랄까? 여름내 뜨겁게 모터를 돌려댔을 게 뻔한 선풍기 몇 대가 보였다. 선풍기들은 이제 곧 창고 어딘가로 사라질게 뻔하다. 요즘엔 가을비가 자주 내리고, 저녁 기온도 뚝 떨어졌다. 불같던 여름은 확실히 지나갔다.

 

우리가 이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그러니까 그녀가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봐도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일로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은 없다는 말, 처치곤란 할 만큼의 뜨거운 슬픔도 태울 것이 없어지면 언젠간 꺼져버린다는 친구의 말이 맞았다. 그러니 사랑이든 이별이든 굳이 뜨거울 필요가 없다고 친구는 덧붙였다. 그 쿨내나는 조언의 주인공이 지금 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내가 미진이와의 이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걸 가장 적극적으로 안타까워하는 장본인이다.

 

“이번엔 어디 갈 건데?”

 

당연히 이 녀석은 이별소화여행기에 대해 알고 있다. 

 

- 연남동에 있는 중국집.

 

마침 그곳에서 찍은 미진이의 사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지튀김이란 요리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며 웃던 미진이를 찍은 사진이다.

 

“그럼 오늘 같이 가면 되겠네. 고량주나 한잔 하게.”

나쁜 남자들의, 나쁜 남자를 위한 수

이곳의 가지 튀김은 최고다. 1층이었던 건물이 3층으로 증축된 이유 역시 가지튀김 때문일 거고.

이렇게 해서 오늘은 친구와 동행을 하게 됐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나쁜 남자’의 매력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남자다. 

 

“걘 그냥 나쁜 여자였어. 나랑 비슷한 냄새가 났다니까?”


- 나도 누군가에겐 나쁜 남자였을 거고, 미진이도 누군가에겐 착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그리고, 사실 나도 미진이에게 그렇게 착한 남잔 아니었기도 하고.


“니가 여자문제로 걔 속상하게 한 적 있냐? 의리는 제대로 지켰잖아. 그럼 나쁜 남자는 아니지. 뭐 서툰 남자라면 모를까. 연애칼럼니스트란 놈이 쪽팔리도 않냐.”


- 엊그제 사진을 지우는데 미진이랑 다트 하던 사진이 있더라?


“청승 떨려면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라.”

 

친구가 내게 술을 따랐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 사진을 지우려다가, 걔가 왼손에 다트를 들고 있는 걸 보게 된 거야. 아, 미진이가 왼손잡이였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엄청 서늘하더라고.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거든? 근데 연애하는 동안 그걸 딱히 인지하고 있었던 적이 없었던 거지.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나도 바지 입을 때 왼쪽 다리 먼저 넣어. 난 오른손잡이인데 말이야. 근데 넌 몰랐잖아.”


- 응.


“15년된 친구가 그런 걸 모른다고 해서 우정이 아닌 건 아니잖냐. 사랑도 마찬가지야. 넌 제대로 사랑했어. 근데 걘 다르지. 너 말고 다른 남자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거잖아? 그러니 아주 나쁜 배신인거고.”


- 어찌됐건, 그런 식으로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잘못이 사실은 수두룩했던 거야. 그러니까 걔가 소개팅까지 한 거겠지.


“아, 답답한 놈. 왜 책임을 너한테 돌리냐. 걔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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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악설을 믿는다. 적어도 나쁜 남자와 착한 남자를 구분할 때는 그렇다.

테이블에 술병이 쌓여갔다. 오늘 우리의 주된 대화는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에 대한 것 이었다. 나쁜 남자를 만드는 건 나쁜 여자고, 나쁜 여자를 만드는 것 역시 나쁜 남자인데 그런 연애의 악순환은 대체 어떻게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논쟁거리였다. 결국 그 지겨운 순환에서 우린 벗어날 수 없으므로, 굳이 착한 남자를 자처하며 희생을 할 필요가 없음을 친구는 재차 강조했다. 뜨거운 사랑 말고 쿨하게 연애나 하고 살자며.

 

“나쁜 남자로 지내는 게 맘 편하다니까? 너도 알잖아. 착한 남자는 늘 여자한테 팽 당하지만 나쁜 남자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거. 말로는 나쁜 남자 싫어한다는 여자들이 결국엔 나쁜 남자한테 끌린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지 않아?”


- 나쁜 남자의 연애가 편하긴 하지. 상대방한테 안 휘둘리고.

 

“그래! 사람들이 너한테 연애 잘하게 해달라고 상담하는 것도 결국엔 그거잖아. 갑이 되게 해달라는 거. 을이 되더라도 뜨겁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 그러다 철들면 알게 되겠지. 사랑은 갑론을박하는 정치가 아니라고. 을이 되더라도 뜨겁게 사랑하는 게 덜 허무하다는 걸 깨달을지도 모르고.


“성인군자 납셨네. 너만 철들고 허무함을 느낀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준대? 요즘같이 무한경쟁에 생존 본능적인 시대엔, 결국엔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발 뻗고 잘 자는 거야. 연애든 뭐든 말이지. 그러니까 너도 그냥 너부터 생각해라.”


-그동안 다른 여자들에게 그렇게 행동했던 걸 이번에 이렇게 벌로 받는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명심해. 여자는 감성의 동물이 아니다. 특히 요즘 여자들은 더 그래. 걔들이 인정 안 한다고 해도,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동물이야. 뭐 자기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알파메일에겐 감성적일지도 모르지. 근데 우린 그 알파메일로 선택 당하는 일보다, 그 선택에 들기까지 경쟁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법이거든.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에게 완전히 선택 당하기 전까진 이성으로 무장해야 해.”

나쁜 남자들의, 나쁜 남자를 위한 수

세상의 모든 남자는 기본적으로 나쁜 남자의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러다 착한 남자가 되려 무던히 노력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렇듯 나쁜 남자 예찬론을 펼치는 녀석도 착한 남자였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하지만 요령 없이 뜨겁기만 한 20대 남자의 설익은 사랑은, 냉정한 여자의 이성에 철저히 무시당하는 법. 그걸 경험하고 난 후론 바뀌어버렸다. 물론 마음 속 한 구석에선 여전히 자신의 착함(?)을 이끌어내 줄 좋은 여자를 끊임없이 찾고 있지만, 우린 우리가 말한 연애의 악순환을 견고히 하는 역할만을 충실히 해내고 있단 생각이다. 그래도 녀석의 나쁜 남자 예찬론 중 수긍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왜 나쁜 남자들이 인기가 많은 줄 아냐? 나쁜 남자들은 오히려 상대방 여자를 착한 여자이게끔 만들어 주거든. 물론 여자들이 사랑받는 기분을 좋아하긴 하지. 근데 본인보다 더 빈틈없이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쁜 여자화’ 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진 않거든. 여자들은 늘 돋보이고 싶어 해. 사실은 되게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도, 본인이 이타적인 사랑을 잘 하고 있단 걸 믿고 싶은 거지. 사실 사랑도 부지런해야 하는 거잖아? 사람들은 원래 게으른 본능이 있고 말야. 그러니 만날수록 자신의 모자람을 확인시켜주는 지나치게 착한 남자보단, 차라리 약간 철없으면서 능력은 있는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거야. 다른 건 괜찮은데 사랑에만 게으른 남자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주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거지. 드라마 여주인공들처럼.”

나쁜 남자들의, 나쁜 남자를 위한 수

다음날 고생할 걸 알면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과, 아플 줄 알면서도 연애하려 하는 것 중 뭐가 더 어리석은 일인지. 무슨 자신감인지.

- 좋은 여자가 뭘까?


“음... 우릴 더 좋은 남자로 만들어주는 여자?”


- 우릴 좋은 남자로 안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나쁜 여자는 아니잖아.


“그게 아니라 적어도 나한테 있어 좋은 여자, 내가 만나고 싶은 여자가 그런 거란 얘기야. 되도록 많은 여자들에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 망할 놈의 수컷 본능을 나 스스로 억제하게끔 해주는 매력의 소유자.”


- 그럼 좋은 남자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냐.”


- 그래서 우리가 좋은 여잘 못 만나는 건가. 좋은 남자가 뭔지도 모르니.


“너 아직 걔 보고 싶지?”


- 절대 아니다. 


“그럼 사진 빨리 다 지우고 다른 여자나 더 많이 만나 임마. 그게 좋은 남자야. 이게 뭐냐 찌질하게.” 

 

찌질. 찌질이란 단어는 남성들에게 주로 사용되는 단어다. 책임감과 생존본능이 강한 여성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그래서 과거는 그저 추억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굳이 과거의 찬란했던 순간을 현실로 끄집어내길 즐긴다. 그 당시 느낀 자극의 맛을 잊지 못해서다. 비생산적이긴 하지만, 그저 재밌기도하고.

 

친구가 먼저 택시를 탔다. 감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나쁜 남자는 절대 찌질할 일이 없다는 걸 마지막까지 강조하는 녀석이 고마웠다. 그 우정 어린 집착 때문이었을까. 정말로 그날 밤 남아있던 미진이와의 사진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지운 건 아니다. 택시에 휴대폰을 놔두고 내려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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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여자)의 정의가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자(여자)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를 충실하게 사랑하고 불안하거나 외롭게 하지 않겠다는 연애 초기의 약속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그런 남자 말이다. 당신이 상대에게 있어 나쁜 연인인지 확인하는 법은 간단하다. “사랑해”라는 말 보다 “미안해”라는 말을 더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아무리 엄청난 이벤트를 해준다고 해도, 이유가 뭐든지 간에, 미안하다는 말이 잦다면 당신은 그리 좋은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 거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사랑해”라고 얘길 해보자.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그리고 명심하자. 연애는 순환이라는 걸. 당신이 잘못한 건 언젠가 그대로 당신이 돌려받게 돼 있다. 그러니 잘 살아야 한다.

맛집정보 : 하하 / 서울 마포구 연남동 229-12. 02-337-0211

201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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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보단 불안을 즐깁니다. 요즘남자요즘연애 [소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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