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샴페인에서, 우리 전통주 향을 느꼈다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삼해주를 더해 만든 샴페인 ‘에스프리 1851’. 잔 속에서 피어오른 전통주의 향과 특별한 제작 배경, 역사적 의미, 한정 수량 정보를 소개합니다.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
공식 샴페인 ‘에스프리 1851’
샴페인을 따자 특유의 거품과 함께 한국 전통주 향이 살며시 피어오르는 듯했다. 병에는 내년으로 140주년을 맞는 한국·프랑스 수교 기념 로고와 함께 ‘에스프리 1851(Esprit 1851)’이라고 인쇄된 라벨이 붙어 있었다.
지난 2일 주프랑스 한국 대사관에서 열린 국경일 행사에서 독특한 샴페인이 최초로 공개됐다. 에스프리 1851은 한국어로 ‘1851년의 정신’이란 뜻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 중 하나인 삼해주(三亥酒)를 더해 완성한 샴페인이다.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 공식 샴페인으로 선정된 ‘에스프리 1851′. 라벨이 2가지로 제작됐다. /코지와인 |
◇두 나라의 아름다운 첫 만남
조선과 프랑스가 ‘조불 우호 통상 조약’을 통해 공식 관계를 맺은 건 1886년이다. 하지만 두 나라가 처음 만난 건 이보다 35년 앞선 1851년이었다. 그해 프랑스 포경선 나발(Naval)호가 전라도 비금도에서 난파했다.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샤를르 드 몽티니(Montigny)가 통역관과 함께 급파됐다.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 선원들이 서양을 배척하는 섬 주민들에게 박해받으며 억류돼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비금도에 도착해 보니 선원들은 무사히 잘 있었다. 나주목(牧)도 적극 협력했다. 철종 2년 음력 4월 1일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는 “비금도에 표류한 이국인 20명의 귀환을 위해 튼튼한 배 2척을 골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조정과 주민들의 호의에 감격한 몽티니 영사는 상하이로 돌아가기 전날인 5월 2일 나주 목사 김재경을 만나 조선의 후의에 감사하는 저녁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산 샴페인 10여 병을 따서 대접했다. 이에 나주 목사는 우리 전통술로 답례했다. 두 나라의 역사적 첫 만남은 양국의 술을 나누며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에스프리 1851 샴페인을 기획한 코지와인 김성중 대표는 “몽티니 영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샴페인을 따라 마신 잔에 전통주를 다시 따라 마셨고, 그렇다면 두 나라의 술이 잔에서 섞이면서 어떤 맛이었을지 궁금했다”고 했다. 김 대표는 평소 친분이 있던 샴페인 생산자 뱅상 샤를로(Charlot)에게 “한국 전통주를 섞은 샴페인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샤를로는 “흥미로운 아이디어”라며 수락했다.
'에스프리 1851'의 뒷면 라벨. 삼해주(SAMHAEJU)를 도사주로 사용했다고 표기했다. /코지와인 |
◇삼해주 첨가해 샴페인 완성
샴페인의 거품, 즉 탄산가스를 얻으려면 와인에 효모를 더해 발효시켜야 한다. 발효가 끝난 뒤 투명한 샴페인을 완성하기 위해 죽은 효모를 제거한다. 이때 효모와 함께 와인이 소량 손실되는데, 이를 보충하기 위해 알코올(술)과 당분을 섞어 추가한다. 이 샴페인 생산의 마지막 과정을 도사주(dosage)라고 한다.
샤를로는 에스프리 1851의 도사주로 삼해주 청주를 사용했다. 삼해주는 정월 첫 돼지날(亥日)에 처음 술을 빚기 시작해 다음 해일에 덧술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해일에 덧술을 쳐서 3번 담금해 저온 장기 발효한 고급 전통주다. 청주와 소주가 있으며, 맛과 향이 뛰어나 양반가에서 많이 찾았다.
김 대표는 “몽티니 영사의 기록에는 ‘맑고 독한 술’이라고만 언급됐을 뿐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샤를로와 함께 전통주를 두루 시음해본 결과 삼해주 청주가 샴페인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판단해 도사주로 선택했다”며 “18세기 국내 조리 관련 자료에는 100가지가 넘는 술이 기록돼 있는데, 이 중 가장 많이 언급된 술이 삼해주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샴페인은 유럽연합(EU) 규정에 따라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정해진 포도 품종과 생산 방식을 따라 생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술을 섞어도 샴페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김 대표는 “도사주로 주로 와인에 설탕을 섞어서 사용하지만, 어떤 술과 당분을 사용해야 하는지는 규정이 없으며 생산자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고 했다.
국내 유통되는 '에스프리 1851' 샴페인은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 기념 로고가 들어간 라벨이 붙지 않고 병에 이름이 직접 인쇄된다. /코지와인 |
에스프리 1851에 들어간 삼해주는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에서 담갔다. 와인 업계에서 일하다 전통주 유통·큐레이션 플랫폼 대동여주도를 만든 이지민 대표는 “에스프리 1851을 시음해보니, 샴페인 자체로도 완성도가 높지만 한국 술 향이 미묘하게 깃들어 있어서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에스프리 1851은 총 3000병 생산됐다. 김 대표는 “한국 대사관이 에스프리 1851을 수교 140주년 샴페인으로 공식 선정했고, 내년에 있을 각종 수교 기념 행사에서 생산량의 일부를 사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대사관에서 사용하지 않는 에스프리 1851 중 300여 병은 삼해주를 제공한 온지음에 보관되며, 나머지는 코지와인을 통해 국내 유통된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