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의 다이아몬드, 와인의 왕, 악마의 잼, 금빛 파스타… 모두 여기가 고향이었네

이탈리아 북서부 토리노와 피에몬테는 미식의 성지다. 땅속의 다이아몬드 흰 송로버섯, 와인의 왕 바롤로, 악마의 잼 누텔라, 금빛 파스타 타야린까지, 진짜 미식 여행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아무튼, 주말]

이탈리아 미식여행

토리노 & 피에몬테

토리노 전경. /피에몬테주관광청

이탈리아에서 로마·피렌체·베네치아·나폴리·밀라노에 비해 상대적으로 토리노는 생소하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주(州)의 중심인 토리노는 20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이자, 산업과 디자인 분야에서 앞서가는 부유한 도시다.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미식의 도시이기도 하다. 축적된 역사와 부, 비옥한 땅을 바탕으로 음식 문화가 꽃을 피웠다. 명품 초콜릿 잔두야와 ‘악마의 잼’이라 불리는 누텔라,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과 세계적 커피 기업 라바짜가 토리노를 중심으로 탄생했다. 서양 3대 진미로 꼽히는 ‘땅속의 다이아몬드’ 송로버섯과 ‘와인의 왕’이라는 바롤로(Barolo)의 고장이기도 하다. 음식에 관심 있다면 토리노와 피에몬테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조선일보

보석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흰 송로버섯. /피에몬테주정부관광청

◇미식 아이콘 흰 송로버섯

늦가을부터 전 세계 미식가들은 토리노에서 차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소도시 알바(Alba)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다. 세계 최고 품질의 흰 송로버섯 산지이기 때문이다. 알바에서는 매년 9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흰 송로버섯 경매가 열린다.


이탈리아어로 ‘타르투포’, 영어로 ‘트러플’이라고 부르는 송로버섯은 캐비아(철갑상어 알)·푸아그라(거위 간)와 함께 서양 3대 진미로 꼽힌다. 과거 극소수 미식가만 즐겼지만, ‘트러플 짜장면’ ‘트러플 삼겹살’ 등 미식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송로버섯은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가 있다. 흰 송로버섯이 훨씬 더 귀하게 대접받는다. 국제 시세가 검은 송로버섯보다 4~5배 높다. 특유의 향이 더 깊고 더 길고 생산량은 더 적다. 역대 최고 기록은 2007년 경매에 나온 1.5kg짜리 흰 송로버섯으로 33만달러(약 4억3400만원)에 낙찰됐다.


흰 송로버섯이 나오는 10월 말부터 이듬해 1월까지 알바는 축제 분위기. ‘트리폴라우(trifolau)’라 부르는 송로버섯 채집가들이 광장에서 이들에게 직접 팔기도 한다. 개를 이용해 땅에 묻힌 송로버섯을 찾는 ‘송로버섯 사냥’ 체험도 가능하다.


토리노와 알바 식당들은 흰 송로버섯 코스 요리를 경쟁적으로 낸다. 특히 알바는 흰 송로버섯이 워낙 많이 모이다 보니, 세계 어디에서보다 저렴하게 흰 송로버섯을 즐길 수 있다. 겨울철 경북 영덕에 가면 다리 하나둘 떨어진 대게를 싼값에 맛볼 수 있듯, 경매 등급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흰 송로버섯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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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롤로 와인과 바르바레스코 와인이 생산되는 랑게 언덕 주변 포도밭. /김성윤 기자

◇와인의 왕과 여왕을 빚는 언덕

피에몬테는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 산지이기도 하다. 토리노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가량 가면 랑게(Langhe) 언덕에 있는 바롤로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이탈리아 와인의 왕’이라 불리는 바롤로가 생산된다. 바롤로 옆 바르바레스코 마을에서 생산되는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이탈리아 와인의 여왕’이라 불린다.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와인 둘 다 네비올로 포도 품종만으로 빚는다. 장미향과 체리·감초·송로버섯 등 복합적인 풍미라는 공통점을 갖는 이유다. 하지만 두 마을의 테루아(terroir), 즉 토양·강수량·일조량 등 와인 생산을 둘러싼 자연환경 차이에 따라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 바롤로가 강렬하고 묵직하다면, 바르바레스코는 섬세하고 우아하다고 평가받는다.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가 세계적 와인이 된 배경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주요 인물인 카부르(1810~1861) 공작이 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기 전인 20대 시절 청년 카부르는 바롤로에 있는 그린차네(Grinzane) 성을 사들였다. 성에 딸린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와인 생산에 열정을 쏟았다. 카부르는 당시 이탈리아보다 와인 생산 기술이 앞서 있던 프랑스에서 와인 양조가를 영입해 현대적 양조 기술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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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몬테 특산품인 헤이즐넛을 더한 잔두야 초콜릿. /카파렐

◇대륙 봉쇄령과 잔두야, 그리고 누텔라

잔두야(gianduja)는 나폴레옹 덕분에 탄생했다. 나폴레옹은 숙적 영국을 무릎 꿇리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토리노의 초콜릿 업체들은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를 수입할 수 없게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이들은 카카오가 부족해지자 피에몬테 지역 특산물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헤이즐넛(개암 열매)을 곱게 간 페이스트를 초콜릿과 섞는 아이디어를 냈다.


헤이즐넛 페이스트는 초콜릿과 의외로 잘 어울렸다. 견과류 특유의 구수한 풍미와 벨벳처럼 매끄럽고 풍성한 질감을 초콜릿에 더했다. 당시 피에몬테에서 인기 높던 마리오네트 인형극 캐릭터 잔두야에서 이름을 따왔다.


잔두야는 몰라도 ‘누텔라(Nutella)’ 이름은 들어봤을 가능성이 높을 듯하다. 빵에 발라 먹는 스프레드의 일종으로, 한번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만큼 중독성이 강해 ‘악마의 잼’이라 불린다. 잔두야의 대중적 버전이랄 수 있다. 잔두야는 진짜 카카오 버터와 파우더에 헤이즐넛 페이스트를 최소 30% 섞는 반면, 누텔라는 값비싼 카카오 버터 대신 저렴한 식물성 기름을 쓰고 헤이즐넛 페이스트 함량도 13%로 훨씬 낮다.


알바에 있던 제과점 ‘페레로’ 주인 피에트로 페레로가 잔두야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했고, 피에트로의 아들 미켈레가 개선 작업을 거쳐 1964년 4월 20일 출시했다. 누텔라가 세계적으로 히트하면서 페레로는 거대한 글로벌 제과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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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핫초콜릿, 크림을 3단으로 쌓은 비체린. /피에몬테주관광청

◇커피·초콜릿·크림의 조화 ‘비체린’

토리노는 이탈리아에서도 커피 문화와 산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로 꼽힌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갓 건너온 커피가 스페인 왕실을 통해 사보이아 공국 궁정에 소개됐다. 1884년 토리노 기업가 안젤로 모리온도(Moriondo)는 증기압을 이용한 에스프레소 머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895년에는 커피 기업 라바짜(Lavazza)가 세워지며 이탈리아 커피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화려하고 유서 깊은 카페가 수두룩하다. 1763년 문을 연 ‘알 비체린(Al Bicerin)’은 토리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다. 생애 마지막 10년을 토리노에서 지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프랑스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 등 명사들이 즐겨 찾았다. 커피·초콜릿·크림을 3단으로 쌓은 ‘비체린’도 여기서 개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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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유서 깊은 카페 중 하나인 카페 플라티. /김성윤 기자

1876년 오픈한 ‘바라티 & 밀라노(Baratti & Milano)’는 1909년 확장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리버티 양식(Liberty Style)에 따라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과 식물 문양으로 꾸몄다. 아름답고 우아한 인테리어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카페 물라사노(Caffe Mulassano)’는 1925년 삼각형 샌드위치 ‘트라메치노(tramezzino)’를 개발했다. ‘카페 플라티(Caffe Platti·1875년)’는 피에몬테 전통 음식으로 가벼운 점심을 먹기 좋다. ‘피오리오(Fiorio)’는 맛있는 젤라토로 이름 높다.


토리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산카를로(San Carlo) 광장에는 ‘카페 토리노(Caffe Torino)’ ‘카페 산카를로(Caffe San Carlo)’, ‘뇌브 카발 드 브론즈(Neuv Caval ’d Brons)’가 있다. 특히 카페 산카를로는 단순한 외관과 달리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매달린 내부가 화려하고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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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긴 막대 모양 빵 그리시니. /김성윤 기자

◇병약한 소공작을 위해 구운 빵

토리노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이 여럿 개발됐다. 그리시니(grissini)가 대표적이다. 이탈리아 식당에서 식사 전 나오는 가늘고 긴 막대처럼 생긴 빵이다.


17세기 후반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마데오 2세는 어려서 병약했다. 소화기가 특히 약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궁정 제빵사 안토니오 브루네로(Brunero)는 가늘고 길게 민 반죽으로 빵을 구웠다. 빵은 소화가 잘되면서 바삭바삭 식감도 좋았다.


공작은 브루네로가 자신을 위해 개발한 빵을 좋아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이 빵을 궁정 공식 빵으로 지정했다. 그의 후손들은 연극을 관람하면서 이 빵을 스낵으로 즐겼다. 빵은 차츰 유명해졌고, 피에몬테 방언으로 ‘길쭉한 빵 반죽’을 뜻하는 그리시아(grissia)에서 유래한 그리니시라 불리게 됐다.


그리시니가 유럽 전역에 알려진 건 나폴레옹 덕분이다. 1801년 토리노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그리시니를 좋아했다. 그는 파리까지 그리시니를 공수하게 했다. 맛도 맛이지만, 수분 함량이 낮아 장기 보관이 가능해 군대 식량으로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시니는 한때 ‘나폴레옹의 지팡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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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와 참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비텔로 토나토. /김성윤 기자

비텔로 토나토(vitello tonnato)는 송아지와 참치가 어우러진 묘한 음식이다. 송아지 살코기를 삶아 차게 식혀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 접시에 깐다. 마요네즈와 통조림 참치, 케이퍼, 안초비(염장 멸치)를 갈아 크림처럼 곱게 만든 소스를 송아지 고기 위에 듬뿍 바른다.


송아지와 참치라니, 어울릴까 싶지만 의외로 궁합이 절묘하다. 맛이 풍성하면서도 고소한데도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무더운 여름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채 또는 가벼운 메인으로 즐겨 먹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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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몬테 전통 파스타 '아뇰로티 델 플린'. /김성윤 기자

◇금빛 찬란한 파스타 ‘타야린’

이탈리아는 향토 음식이 발달한 나라다. 피에몬테에도 지역만의 파스타가 여럿 있다. 타야린(tajarin)은 달걀노른자만으로 반죽해 뽑는 생파스타. 파스타는 물 대신 달걀로 만들면 훨씬 고급으로 친다. 과거 달걀이 비쌌기 때문이다. 토리노·밀라노·볼로냐 등 부유한 이탈리아 북부에서 달걀 파스타가 발달한 이유다.


타야린은 달걀 중에서도 노른자만 쓴다. 달걀 전체를 사용할 경우 밀가루 1kg당 달걀 6~10개가 들어가지만, 노른자만 사용하면 30~40개가 필요하다. 토리노가 옛부터 얼마나 부유하고 풍요로웠는지 알 수 있다.


선명한 황금빛과 혀에서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식감이 관능적이다. 토리노 사람들은 “타야린 자체의 맛을 즐기려면 소스가 ‘버터와 세이지’처럼 단순할수록 좋다”고 하지만, 고기가 듬뿍 들어간 진한 라구(소스)와도 찰떡궁합이다.


아뇰로티(agnolotti)는 피에몬테식 만두다. 얇고 넓적한 직사각형으로 편 달걀 파스타를 송아지·돼지·토끼 따위 고기와 채소, 치즈를 다져 섞은 속으로 채운다. 한국 물만두 정도 크기로 작은 편이다. ‘아뇰로티 델 플린’은 더 작고 섬세하다. 성인 남성 엄지 손톱 크기를 넘지 않는다. 이렇게 작게 만들려면 손끝으로 꼭꼭 눌러야 한다. 그래서 피에몬테 사투리로 ‘꼬집다’는 의미인 플린(plin)이 붙었다.


토리노 사람들은 “아뇰로티 델 플린을 먹는 궁극의 방법은 소스 없이 냅킨에 싸서 먹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면 아뇰로티가 식지 않고, 냅킨이 여분의 수분을 흡수해 아뇰로티가 불거나 눅눅해지지 않고 아뇰로티 자체의 맛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밭일 나가는 농부들이 즐겨 먹던 방식으로, 요즘은 보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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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무트로 만드는 칵테일 네그로니. /김성윤 기자

◇007 칵테일의 기본 ‘베르무트’

토리노에 갔다면 영국 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가 사랑한 칵테일 마티니(martini) 한 잔은 마셔야 한다. 마티니의 기본 재료가 되는 베르무트(vermouth)의 고향이 토리노이기 때문이다.


베르무트는 주정과 향초·약초를 넣어 향미를 낸 와인이다. 향쑥을 뜻하는 독일어 베르무트(wermut)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베르무트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주로 약으로 사용됐다. 오늘날 마티니를 비롯해 여러 칵테일에 사용하는 현대적 베르무트는 토리노 상인 안토니오 베네데토 카르파노(Carpano)가 1786년 개발했다.


카르파노의 베르무트가 인기를 얻자 토리노에서는 비슷한 베르무트가 속속 등장했다. 19세기 중반~20세기 초 마티니가 개발될 무렵 ‘마티니 & 로시’가 가장 많이 팔리던 베르무트였기 때문에 칵테일 이름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토리노(이탈리아)=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5.09.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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