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더운 여름을 ‘아쌀하게’ 나는 술

춘향전에 나오는 여름을 나는 술 과하주는 달고, 복분자주는 드라이 했다.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과하주와 복분자주


겨울에는 아주 추운 것이 좋고 여름에는 아주 더운 것이 좋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 900년대에 태어난 세이 쇼나곤이라는 사람으로 나는 이 사람의 글을 좋아한다. 편협하고 시야가 좁은 면이 있긴 하지만 재기와 유머가 있어서다. 아쌀하달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어린이였던 내게 ‘아쌀하다’라고 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표정으로 그게 칭찬이라고 느꼈다. 대단한 칭찬은 아니고 75% 정도의 칭찬. 그래서 감사하다고 하지는 못하고 살짝 웃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아쌀하다’라고 해본 적은 없다. 사전에 없는 말인 데다 용례도 잘 모르기 때문인데 지금 이렇게 나와버렸다.


조선일보

향만 맡아도 장어덮밥이 떠오르는 복분자주. /조선일보DB

서설이 길었다. 여름의 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과하주라는 술에 대해서. 이름에 여름이 들어간 여름의 술인 과하주에 대해서 여름에 한번은 쓰고 싶었다. 과하주(過夏酒), 즉 ‘여름을 나는 술’이 어떤 술일지 오래도록 궁금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들었던 것은 ‘춘향전’이었을 것이다. “술 이름을 이를진대, 이태백 포도주와 천 년을 살았다는 안기생의 자하주와 산림처사의 송엽주와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 팔팔 뛰는 소주, 약주” 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듣기 위해서라도 ‘춘향가’를 듣고 싶다. 처음 들었을 때는 술 이름을 새기려고 급급했었는데 이제는 입맛을 다실 수도 있으니.


과하주는 지나치게 달았다. 모든 과하주가 그런지 모르겠으나 내가 마신 과하주는 그랬다. 왜 이렇게 달아야 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냉방 시설이 없던 시절에 술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도수도 어느 정도 이상이면서 달아야 했을 것이다. 내가 단 술을 모두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토카이와 소테른, 베렌아우스레제 같은 단 술의 뭐라 말할 수 없던 정취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술이 맛있었던 순간은 결코 잊지 못한다.


내가 마신 과하주는 복합적이지 않았다. 달면서 짜릿하거나, 달면서 시큼하거나, 달면서 쿰쿰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달면서 향기롭지 않았다. 약간은 향기로웠을 수도 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달았다’라고 느꼈다. 입체적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색으로 따지자면 정직한 원색의 느낌. 명도도 높고 채도도 높은 느낌. 과하주라는 근사한 이름을 감당할 정도의 맛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하주를 사면서 함께 샀던 복분자주가 구원이 되었다. 이렇게 달지도 들큼하지도 텁텁하지도 않은 드라이한 복분자주가 있다니… 상당한 보람이었다. 시중에 있는 복분자주와 다른 방식으로 만든 복분자주라기에 모험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투명한 루비색! 언더록 스타일로 마시려고 잔에 돌 얼음을 넣고 술을 따라 그렇게 되었겠지만, 꼭 피노누아 같아서 호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물론 피노누아의 복합적인 향기는 나지 않는다. 복분자주에서는 복분자주 향기가 났다. 정직한 향기. 향기는 단순하지만, 술은 맛있었다. 복분자도 이렇게 충분히 맛있는 술로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복분자 냄새를 맡고 있으니 장어 덮밥과 함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가리는 게 없는 편인 내가 가리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이 장어다. 미끌미끌하고 달달한 맛이 싫은지 원초적으로 꿈틀대는 장어의 활력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그토록 장어라면 거리 두기를 하던 내가 복분자주를 마시다가 장어 덮밥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복분자주, 그러니까 들큼하고 달달한 그 술과 이 술은 달랐기 때문이다. ‘장어엔 복분자주’라는 조합을 대체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자가 ‘이런 복분자라면!’이라며 실험을 하고 싶어진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술과 어울리는 극강의 안주를 찾아 술을 마시는 게 또 술꾼 된 자의 우직한 보람 아니겠는가? 이 복분자주를 파는 장어집을 찾아내 여름의 끝자락을 나누고픈 사람과 가야겠다며 채비를 차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세이 쇼나곤 여사께서는 이런 제목으로 짧은 글을 썼다. “거창한 이름 – 별것도 아닌 것이 한자로 쓰면 어마어마한 것.” 그러고서 거창한 이름을 가진 것들을 나열하는데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복분자다. 覆盆子. 뒤집힐 ‘복’에 항아리 ‘분’… 어쩌다 이렇게 요란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애처롭다는 생각. 거창한 이름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올망졸망한 열매니까.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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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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