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얼하고 매운 마라는 감각을 깨우고 매끄러운 두부는 부드럽게 스며드네

정동현의 pick

[아무튼, 주말]

마파두부

광교 '루지면관'

조선일보

경기도 수원 광교 ‘루지면관’의 마파두부밥(앞에서부터)과 옥수수전병, 마라우육면.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호주 멜버른 차이나타운 한 중국집에 앉았다. 나는 늘 후줄근한 옷차림에 피곤한 얼굴을 하고 식당 뒤편 자리를 차지했다. 주방에서 16시간을 일한 다음 날 휴무가 되면 예배를 드리듯 똑같은 식당에 갔다. 시키는 메뉴는 매번 같았다. 마파두부 한 그릇에 만두 한 접시, 맥주 한 병이었다. 주방에는 중국어, 홀에는 영어가 가득했다. 한국어로 생각하는 나는 입을 다물고 음식을 기다렸다.


곧 종업원이 나를 힐끗 보고는 '또 너냐' 하는 눈빛으로 빨간 고추기름이 뜬 마파두부와 흰 쌀밥을 놓고 갔다. 그 옆에는 하얀 김이 서린 차가운 맥주가 놓였다. 맥주의 따가운 탄산과 한기(寒氣)에 정신이 들었다. 곧 마파두부를 떠서 하얀 밥 위에 올렸다. 매콤하고 시큰하고 찌르르한 맛이 입술과 혀에 느껴졌다. 밥알의 찰기와 매끄러운 두부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순간, 외국인 노동자로 팍팍하게 살던 나는 무언(無言)의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 기회가 될 때마다 마파두부를 찾았던 것은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중식 대부분이 산둥성(山東省)과 대만에서 넘어왔기에 사천 지방의 요리인 마파두부 맛은 본토와 차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혀가 얼얼하게 매운 마라(麻辣) 요리 붐이 불면서 마파두부를 취급하고 또 제대로 만드는 식당이 많아졌다.


서울 여의도 충무빌딩 2층 '동방양고기'는 양꼬치와 양다리, 양갈비 등 양고기 전문이지만 매콤한 마파두부의 맛을 보지 않고는 빠져나오기 힘든 곳이다. 1980년대 지은 충무빌딩의 굵은 골격 안, 자욱한 연기가 가득한 이곳을 지키는 건 나이 든 중년의 부부다.


주방을 책임지는 건 사자후를 내뿜을 것 같은 파마머리 여주인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호쾌하게 중화냄비 웍을 돌리는데 그 기세가 여느 남자를 쉽게 누르고 만다.


바쁘게 도착한 마파두부를 보면 깔린 국물 없이 살짝 건조하게 볶아냈다. 두부는 큼직하고 혀에서 일어나는 맛의 힘도 크다. 거인이 발자국을 찍듯 뜨겁게 매운맛이 혀를 쿡쿡 찔러 누른다. 얼굴은 벌게지고 그 열을 누르려 시원한 약주 한 잔을 또 일행에게 권하게 된다. 마치 중국 어느 시장 한쪽에 온 듯 떠들고 웃는 소리가 가득한데 시끄럽지 않고 장단을 맞추듯 서로 흥만 돋운다.


한강을 가로질러 송파에 가면 '오향가'가 있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긴 줄을 서야 하는 이곳은 기본 메뉴가 족발이고 곁들여 중식을 판다. 그 조합을 보면 신뢰가 가지 않지만 나온 음식을 보면 '이런 곳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뒤따른다.


족발은 최소한 서울 남동부를 평정할 만하다. 살코기를 크게 썰어 튀긴 탕수육은 잔기술 대신 고기라는 중심 주제에 방점을 찍었다. 큰 대접에 담긴 마파두부는 전분을 풀어 걸쭉하지만 사천 후추 화자오(花椒)의 아릿한 맛을 타협하지는 않았다. 후추와 고추, 두반장, 화자오의 각기 다른 매운맛이 층을 이룬다. 고추기름은 그 매운맛을 하나로 묶어 혀에 올린다. 밥과 두부는 매운맛을 피해 쉴 틈을 준다. 족발과 탕수육, 마파두부, 게다가 볶음밥까지 따로 시키면 동북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밥상이 만들어진다.


서울을 떠나 경기도 수원 신도시 광교에 가면 작게 문을 연 '루지면관'이 있다. 노부부가 자리를 지키는 이곳은 야트막한 바 카운터 좌석만 아담하게 갖췄다. 훤히 보이는 작은 주방을 지키는 머리 하얀 사내는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그때그때 조리를 시작한다. 은퇴하고 중국에서 요리를 배웠다는 주인장은 빠르지 않지만 정돈된 몸놀림으로 음식을 낸다.


얼큰한 마라우육면은 휴일 점심 해장하려는 이들이 먼저 주문을 넣는다. 국물 없이 비벼먹는 탄탄면은 아릿한 향과 어우러지는 고소한 맛에 한 그릇을 비워도 질리지 않는다. 작은 프라이팬에 여주인이 부쳐내는 옥수수 전병은 빼놓으면 안 되는 메뉴 중 하나다. 화려한 기교 없이 꾹꾹 눌러 부친 이 전병을 한 입 베어 물면 노란 옥수수가 알알이 터진다.


하루 20그릇만 파는 마파두부는 가장 먼저 마감되니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주인장이 좁다란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작은 냄비를 돌리면 이내 쌀밥과 함께 마파두부가 나온다. 잘린 두부의 모서리는 부서진 기색이 없다. 매콤한 맛에는 불쾌하게 신경 거슬리는 잡음도 없다. 대신 흐뭇하게 올라오는 이국적인 열기에 쌀밥을 깨끗이 비운다.


촘촘하게 얽힌 맛의 얼개, 부산스럽지 않은 움직임 속에 마지막 맛이 말끔하게 똑 떨어진다. 그리고 오래전 멜버른의 휴일이 떠오른다. 무뎌진 감각을 깨우던 매콤한 맛, 부드럽게 위장에 스며드는 두부의 감촉, 익숙한 식당의 수더분한 정겨움. 이 작은 가게가 품고 있는 따스함이 이끌어낸 추억의 맛이다.


[정동현]

2020.06.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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