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性전환 중입니다”… 은행나무, 거리의 젠더 논쟁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은행나무 논쟁. 악취 민원 속 ‘암나무 → 수나무 교체’가 전국서 진행 중입니다.

전국서 암나무→수나무

눈총에 사라지는 秋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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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의 한 은행나무 암나무 앞에 인상적인 푯말이 꽂혀있다. 수나무를 접붙여 열매가 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광양시

가을의 정취는 냄새로 먼저 온다. 유구한 역사의 × 냄새, 지역 불문이다.


이를테면 강남구에는 서울에서 가장 많은 가로수가 있다. 이 중 은행나무가 6946그루로 최다인데 암나무가 30%에 달한다. 암나무는 열매를 떨군다. 매년 발생하는 ‘폭탄’이 4t 규모. 강남구 관계자는 “신속히 치우고는 있지만 예산과 인력에 한계가 있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섰다”며 “2년 전부터 작업에 착수해 올해만 선릉로·일원로 일대 은행나무 암나무 115주를 뽑아내고 수나무로 교체했다”고 말했다. 과육의 생성 자체를 차단해 냄새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일종의 탈취(脫臭) 작전이다.

◇강북에는 은행 열매가 없다?

강북구에는 가로수 중 은행나무 암나무가 ‘0’이다. 구청 관계자는 “공원 등을 제외한 가로수용 도로변 은행나무 암나무 1053그루 전부를 수나무로 바꿔 심었다”며 “거리에서 은행 열매가 사라지자 악취 민원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가을철 은행나무 열매로 인한 불편 해소 차원에서 지난 8월 종합 대책을 세워 각 구청과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열매가 익어 땅에서 으깨지기 전 미리 채취하는 ‘은행 털이’ 등의 방법이 동원되고 있으나, 역시 가장 확실한 건 ‘뿌리 뽑는 것’이다. 작업 예산 지원 등을 통해 서울시 내 은행나무 암나무는 2016년 약 3만1000그루에서 지난해 2만5127그루로 꾸준히 줄고 있다.


은행 지린내는 전국적이다. 오죽하면 지난해 경남 김해시는 시목(市木)을 은행나무에서 이팝나무로 변경했을 정도. 열매는 수거해 경로당 등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농약 및 중금속 우려로 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늘면서 폐기물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전국 지자체마다 ‘암나무 소탕’ 작업이 활발한 이유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대전. 올해 수나무 926그루를 새로 심어 동구·중구 은행나무 암그루를 모두 없앴다. 최근 3년간 총 2500그루, 시 전체 교체율 70%. 시 관계자는 “은행나무는 외형으로는 암수 구분이 어려워 전년도 가을에 열매가 맺힌 걸 보고 미리 페인트 등으로 표시를 해둔다”고 말했다. 인천 미추홀구 등도 올해 관내 암나무에 식별용 표찰을 설치했다.

◇여기서 ‘여혐’이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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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한 은행나무 암나무에 달려있는 표찰. 제거 및 열매 조기 채취 등 선제 대응을 위한 조치다. /미추홀구

황당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20년, 가을마다 “냄새가 지독하다”거나 “거리가 지저분해진다”는 민원이 쇄도하자 경기 안양시 만안구 측은 칼을 빼 들기로 결정했다. 그해 5월 암나무마다 ‘♀’ 표찰을 붙였다. 


의외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일부 여성·환경 단체가 “여성 표식을 달아서 ‘암나무는 악취가 나고 해악을 끼치므로 피해야 한다’고 알리는 낙인찍기”라며 반대 성명서를 냈다. “상징적 기호를 통해 여성성을 배제하고 공격하고 정복할 대상으로 인지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공권력이 자연과 생식을 통제하고 있음을 전시하기 위해 여성 혐오를 유발하는 성인지 감수성 부재 정책”이라는 주장이었다.


‘수간(樹幹) 주사’도 도마에 올랐다. 은행나무 암나무에 주입해 열매 생성을 억제하거나 조기 낙과를 유도해 여러 지자체에서 악취 선제 대응 수단으로 활용하는 도구. 그러나 여성·환경단체 측은 “암나무라는 이유로 표찰을 달고 수간 주사를 놓아 괴롭혀도 되겠는가”라며 “악취가 우려된다면 수확기 해당 지역에 공공 인력을 투입해 열매가 부서지기 전에 수거하는 방안을 권유한다”고 했다. “그러면 여름에 모기 없애는 것도 여혐이냐”며 억지스럽다는 반론도 거셌지만, 잡음이 커지자 구청 측은 “의견을 존중한다”며 암나무 표찰을 모두 뗐다.

◇수술대 오른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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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의 한 은행나무 암나무 앞에 인상적인 푯말이 꽂혀있다. 수나무를 접붙여 열매가 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광양시

전남 광양시 우산웰빙테마공원 내 은행나무 앞에는 ‘은행나무 암수 전환 수술 중’이라는 푯말이 꽂혀 있다. 품종 개량 등을 위해 쓰는 접목(接木)을 가로수에 적용해 암나무에서 은행 열매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다. 광양시 관계자는 “산책로 인근에서 낙과로 인한 불편 민원이 발생해 은행나무 암나무 26주를 대상으로 수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방안을 시도했다”며 “2년 전 사업을 완료했는데 아직까지는 열매가 달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일단 심고 보는 식이었다. 은행이 발아해 암수 성질을 드러내는 데 최소 15년이 걸리니 복불복이었다. 이와 관련해 괴이한 전설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해 내려온다. 조선 중기 대사성을 지낸 윤탁(1472~1534)이 성균관 명륜당 뜰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공자와 유학을 상징하는 나무, 성균관대학교의 교목(校木)이기도 하다.


다만 해마다 열매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고 열매를 치우는 수복들이 뜰에서 떠들어대는 통에 곧 골칫거리가 됐다. 질려버린 한 성균관원이 은행나무에 이를 고하며 제사 지내자 이후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 그러나 이제는 고사까지 지낼 필요가 없다.


국립산림과학원은 30여 년 연구 끝에 열매 없는 가로수용 은행나무 ‘이룸1호’를 개발해 지난해 품종 보호 등록을 완료했다. 생장 형태가 다양한 개체 39개를 수집·증식해 시험림을 조성한 끝에 열매를 맺지 않는 별종 수나무 1본을 얻어낸 것이다. “가을철 악취 문제 해결이 기대된다”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대신 위로 솟구치는 형태라 협소한 도심 공간에도 적합하다”고 했다. 


개체 수를 늘려 전국에 보급한다는 계획. 서울시도 암나무에 수나무를 접붙이는 시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잠실종합운동장 인근 은행나무 세 그루를 대상으로 실험에 착수했다. 다만 시간이 관건이다. 나무를 기르는 건 십년지계이기 때문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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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시 팔달구 도청오거리 인근 은행나무마다 설치된 '열매 수집망' 밑으로 행인이 걸어가고 있다. /뉴스1

매년 반복되는 난리통에도 은행나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공기 정화 능력과 화재·병충해에 강한 가로수로서의 기능적 탁월함이다. 은행나무 교체 시 발생하는 비용은 그루당 100만원 내외. 1000그루만 단순 계산해도 세금 10억원이 들어가는 셈이다. 


지난해 서울 성북구는 관내 은행나무 암나무 221그루를 베고 수나무로 교체하는 ‘은행 암나무 바꿔 심기 사업’을 추진했다. 주민 항의가 잇따랐다. 한 구민은 “지금이 냄새 핑계로 이미 잘 자란 나무 베는 데 돈과 시간을 쓸 때는 아니다”라며 “악취라 하면 자동차나 담배 연기, 음식점 기름 냄새가 더 심각하다”는 반대 민원을 제기했다. 해당 사업은 중단됐다.


뒤집힌 우산 형태의 ‘열매 수집망’을 나무 몸통에 설치해 열매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아이디어도 확산하고 있다. 베어낸 은행나무 암나무 대신 심은 어린 수나무가 가로수로 제대로 기능하려면 20년 정도 소요되기 때문이다. 예산 부담에 환경 단체 및 주민 설득 등의 여러 비용을 감수할 정도로 ‘냄새’가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한 목소리도 적지 않다. 


강원도 춘천시 관계자는 “은행나무가 워낙 덩치가 크고 주변 보도블록까지 손대야 하다 보니 비용 문제로 교체 작업은 아예 고려를 못 하는 실정”이라며 “나무가 365일 사람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까맣게 잊고 이맘때 30일을 못 참아서 베어낸다는 게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정상혁 기자

2025.11.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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