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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아무튼, 주말][허윤희 기자의 발굴]

“포기하고 싶을 때, 1회전만 더 뜁시다… 기적이 펼쳐집니다”

by조선일보

‘국민 코치’로 인생 2막 펼치는

전설의 복싱 세계 챔피언 홍수환

일흔 넘은 챔피언은 여전히 힘이 넘쳤다. 사진 촬영을 위해 권투 장갑을 껴달라고 부탁하자, 홍수환은 입으로 '치치칙' 소리를 내며 30분 넘게 어퍼컷을 날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 홍수환(72)의 휴대폰 뒷번호는 ‘7845’다. ‘7전8기(七顚八起)’라는 고사성어를 ‘4전5기’로 바꿔버린 그날을 기념하려고 스스로 고른 네 자리다. 한국 프로복싱 역사의 신화로 남은 명장면이었다. 1977년 11월 27일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그는 2라운드에서만 4번 쓰러지고도 3라운드서 상대를 KO로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강연 요청이 쇄도해요. ‘4전5기’ 정신, 네 번 쓰러졌다가 다섯 번째 일어서서 죽기 살기로 승리를 일궈낸 비결을 들려달라고.”


20년간 관공서, 대기업, 군부대 등에서 1300여 회 강연하며 ‘입담’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강연을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주요 경기 장면을 편집한 영상부터 보여준다. 청중은 ‘4전5기 신화’를 만든 명장면에서 일제히 함성을 터뜨린다. “사업하다 시련을 겪고 있었는데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여기가 끝인가 하고 포기하려 했는데, 한 번 더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쏟아지는 감사 인사를 들으면 자신도 팔팔해진다고 했다. “강연하면서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어떻게 4번을 일어났느냐는 거예요. 답은 늘 똑같아요. 내가 저놈을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렇게 질 수는 없다는 거죠. 연습을 안 한 놈은 ‘안’ 일어납니다. 일어나봤자 질 것 같으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도 ‘못’ 일어나는 인생을 살아야지, ‘안’ 일어나는 인생을 살면 되겠어요?”


홍수환은 최근 유튜버로 변신했다. 유튜브 ‘홍수환 복싱 TV’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잽 날리는 비결, 영화 ‘록키’ 훈련법 전격 분석 등을 특유의 달변으로 소개한다. “몸통이 먼저 돌아가야 돼. 그래야 팔이 쭉 뻗쳐지는 거거든. 팔부터 나가니까 안 되는 거야. 자, 보라고!” “타이슨, 걔는 완전히 발로 때리는 거야. 체중이 다 실리잖아. 하체에서 잡아주면 어깨가 팍팍 돌아간다고. 모든 운동은 하체야 하체!” 귀에 쏙쏙 꽂히는 챔피언의 명강의가 10~20대 여성들까지 사로잡았다. 여성들은 “복싱 덕에 다이어트도 성공하고, 체력도 좋아졌다”며 열광하고, 남성들은 “몸 돌리는 것부터 연습했더니 확실히 펀치력이 달라졌다. 괜히 전설이 아니다”라고 감탄한다.


전국 단위 강연에 일반인을 위한 복싱 유튜브까지, ‘국민 코치’로 인생 2막을 펼치며 패기와 긍정 에너지를 전파하는 홍수환을 서울 북아현동 그의 체육관에서 만났다. 지하 체육관에 사각 링이 있고,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복싱도 가르치고 유튜브도 찍는다. 인터뷰 내내 3분마다 자동으로 공(gong)이 “땡!” 하고 울렸다. 일흔 넘은 챔피언의 목청도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경제도 어렵고 다들 우울하다고 하는데, 3분만 더 뛰자고. 1회전이 3분이니까, 딱 1회전만 더 뛰어봅시다. 내가 카라스키야 선수를 이기고 기적을 만든 것도 딱 1회전 더 뛰었기 때문이잖아요? 땡, 치면 멋지게 나가서 싸우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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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이 일반인을 위해 진행하는 복싱 유튜브. /유튜브 '홍수환 복싱TV'

◇전 국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건 스포츠뿐

-‘홍수환 TV’ 덕에 권투에 입문했다는 여성이 많다.


“그럼, 그럼! 재미있으니까. 다이어트 때문에 고민인 사람 있으면 체육관 나오라고 그래. 줄넘기 하면 살이 쭉쭉 빠지고, 허리 통증도 사라진다. 권투만 한 스포츠가 없다.”


-요즘도 강연을 많이 하시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1994년부터 전국으로 강연을 다녔다. 그래서 내가 휴대폰이 두 대다. ‘7845′ 말고 ‘7846′도 있다. 운전할 때는 휴대폰을 내비게이션으로 쓰니까 한 대가 더 필요하다. 그 정도로 섭외 전화가 많이 온다.”


-무슨 주제로 강의하나.


“대기업이든 관공서든 군부대든 주제는 같다. 프로 정신을 갖자는 것. 사람들이 45년 전 복서에게 얻고 싶은 건 하나다. 당신이 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 4전5기의 오뚝이 정신이다.”


-유튜브는 왜 시작했나.


“조카의 권유로 시작했다. ‘철없던 사랑’ 부른 가수 홍수철이 동생인데 지금은 목사가 됐다. 그 아들이 체육관 관장인데 누구라도 쉽게 복싱을 접하면 좋을 것 같다고 권해서 시작했다.”


-‘역시 레전드’라는 댓글이 많더라.


“아주 기본적인 것만 툭툭 보여주는데도 좋아하더라고. 하체가 중요하고, 팔만 뻗지 말고 몸통을 움직이라는 거. ‘10년 배워도 몰랐던 걸 10분 만에 터득했다’는 반응 보면 기분이 좋지.”


-카타르 월드컵이 개막했는데, 과거엔 복싱 인기가 월드컵보다 더 대단했다더라.


“전 국민을 같은 시간에 하나로 뭉치게 하는 건 스포츠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복싱이 제일이다. 왜? 인간 대 인간이니까. 다른 건 다 공 차는 거 아니면 공 때리는 거잖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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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이 1974년 세계 챔피언이 된 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홍수환 제공

◇남산 계단 1978개 단번에 오를 때까지

홍수환은 열아홉에 권투 선수로 첫발을 디뎠다. 스물네 살에 밴텀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고, 스물일곱에 주니어페더급 세계 타이틀을 석권했다. 50전 41승(14KO) 4무 5패. 그는 “내 주먹은 권투를 하기에는 작고 약했다. 펀치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철저한 연습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복싱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


“아버지가 복싱을 광적으로 좋아하셨다. ‘아들 펀치 맛을 보고 싶다’면서 당신의 배를 탁 걷어 때리게 했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복싱에 인생을 걸기로 작정한 건 고1 때다. 1966년 6월 25일 김기수 선수가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걸 보고 가슴이 뛰더라. 아버지 무덤에 꼭 챔피언 벨트를 갖다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나.


“시작은 안 좋았다. 아마추어 전적이 2전 2패다. 눈탱이가 밤탱이 돼서 집에 갔더니, 그때까지 복싱하는 걸 반대하던 어머니가 ‘너 한 번은 이기고 관두라우’ 하시더라. 그 말씀이 큰 힘이 됐다. 경북 영천에 사는 김준호 선생을 찾아가 합숙하면서 프로로 데뷔했다.”


-아마추어에서 계속 졌는데 어떻게 프로 데뷔 후 이길 수 있었을까.


“김 선생님이 허리로 하는 복싱을 가르쳐줬다. 불광동 고개를 뛰어 올라가면서 연습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연습을 안 하면 안 된다. 연습이 스승이다.”


-어떻게 연습하나.


“일주일에 최소 닷새는 아침에 뛰어야 한다. 안 그러면 호흡 순환이 안 된다. 아침에 뛰고 나면, 3분 경기하고 1분 쉴 때 새 힘이 확확 돌아온다.”


-1974년 7월 4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널드 테일러를 네 번 다운시키고 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했다.


“육군 일병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테일러 측에서 나를 만만히 보고 1차 방어 상대로 고른 거다. 남아공 더반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도쿄-홍콩-스리랑카-세이셸-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비행기 5번을 갈아탔다. 그래도 지겹지가 않더라. 세계 챔피언 따겠다는 일념으로.”


-이길 거라고 기대했나.


“주변에선 기대를 안 했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이놈만 이기면 우리 엄마가 더 이상 미군 부대에서 식당일 안 해도 된다고, 정말 철저히 준비했다. 남산 계단이 몇 개인 줄 아나? 1978개다. 그걸 매일 뛰었다. 한 번도 안 쉬고 단번에 오르는 게 불가능한 줄 알았다. 정상을 쳐다보지 않고 계단만 보고 뛰었더니, 눈앞에서 계단이 사라지는 순간이 왔다. 몸이 새처럼 가벼워지는 걸 느끼면서 단숨에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남산 계단을 정복하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 감동은 말로 다 표현을 못 한다. 더반에 와 있던 한국 원양어선 선원 2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불러줬다. 그래서 내가 태극기를 좋아한다. 외국 가서 뜨겁게 태극기를 흔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위대함을 모른다.”


-어머니 황농선 여사와의 유명한 통화가 여기서 나왔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즉흥적으로 나온 건가.


“그럼, 그걸 짜고 했겠나. 부모님이 다 이북 신의주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챔피언 먹었다’는 표현이 나온 거 같다. 자세히 들어보면 어머니가 ‘대한민…' 하다가 ‘국민 만세다’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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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첫 세계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이 귀국 직후 환영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 어머니 황농선 여사(오른쪽)가 함께 기뻐하고 있다. /홍수환 제공

-귀국 후 카퍼레이드도 모친과 함께 했고,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도 만났다.


“격려금으로 200만원을 받았다. 당시 신사동 사거리가 평당 500원 할 때니까 엄청난 거액이었다. 절반인 100만원을 당시 혼수상태에 있던 문정호 선수의 병원비로 쾌척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 같다.”


-어머니께 효도를 다 한 기분이었겠다.


“그렇지는 않다. 권투라는 게 부모 속 썩이는 직업이다. 우리 어머니는 중요한 시합 때마다 장충체육관에 오셨는데, 아들 맞을까 봐 경기장에서 못 보고 화장실에 계셨다. 지나가는 친구들 불러서 ‘수환이가 지금 때리냐 맞냐’ 물어봤다더라. 이긴다고 하면 좋아서 화장실 밖으로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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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아현동 체육관에서 챔피언 홍수환(오른쪽)이 요즘 한창 가르친다는 김민희(17)양과 나란히 사각 링 로프를 걸치고 서있다. 그는 "민희는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될 것"이라며 "복싱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꿈나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네 번 넘어지고 오기로 덤볐다

사람들은 그의 성공만 기억하지만, 이후 그는 쓰라린 패배를 겪는다. 2차 방어전 상대로 숙명의 라이벌인 알폰소 사모라를 만난다. 홍수환 복싱 인생에 유일하게 2패를 안긴 장본인이다. 그는 “LA까지 가서 4라운드 KO패로 지고 귀국했더니 역적이 돼 있더라. 군대에선 지고 돌아왔다고 일주일 영창을 보냈다. 안 그래도 아픈 가슴이 더 쓰라렸다”고 했다.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로 영창을 갔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말이다. 감방에 앉아 있었더니 간부가 와서 ‘소속과 군번을 대라’고 했다. ‘예! 61034029 일병 홍수환!’ 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강연 때마다 이 이야기를 꼭 한다. 내가 비참하게 사모라한테 두 번을 졌기 때문에 ‘4전 5기’가 가능했다고. 사모라한테 LA 가서 지고, 인천으로 불러서 시합했는데 또 졌거든. 거기서 복싱을 접었으면 ‘4전 5기’는 없는 거다.”


-인천 경기 때 ‘파이트 머니(대전료)’를 가족들이 스스로 마련했다던데.


“대전료 10만달러에다 사모라 측 체재비를 우리가 다 대주는 조건이었다. 동부이촌동 집을 팔고, 우리 집안 먹여살리던 목욕탕도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집안의 전 재산을 걸 정도로 자신 있었는데, 12회 TKO패로 끝났다. 주심의 편파판정에 문제가 많았다. 너무 억울했지만 패배는 패배니까. 이후 밴텀급은 더 이상 무리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마침 WBC에서 주니어페더급을 신설했다.”


이윽고 그의 운명을 바꾼 경기가 다가왔다. 상대는 그보다 열 살 어린 17세 헥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 11전 11승 11KO승의 강펀치로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이 붙은 피 끓는 청춘이었다. 매스컴에선 “홍수환이 이기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격”이라고 했다. “모두가 나의 패배를 예상했지만 상관없었다. 내 은퇴 시합이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준비했다. 이기고 끝내느냐, 지고 끝내느냐가 달려 있었다.”


-네 번을 쓰러졌는데 어떻게 승리했나.


“원래 복싱에선 한 라운드에 3번 다운당하면 자동으로 패하는 건데 이 룰이 없어졌다. 카라스키야가 먼저 무제한 다운제를 제안했다. 그만큼 완전한 KO 승리를 자신한 거지. 그런 오만함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됐다. 결국 2회전에 4번 다운당한 후 3회전에서 녀석을 완전히 KO로 눕혀버렸다. 심판도 내가 다운당했을 때는 카운트를 천천히 하더니, 카라스키야가 다운당하니까 빨리 세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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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으로 QR 코드를 찍으면 '4전5기 신화' 홍수환의 영광의 순간들을 화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4전5기’의 신화가 탄생했다.


“‘4전5기’의 진짜 뜻은 ‘4번 다운당하고 5번 일어나 이겼다’가 아니다. ‘4번 다운당하고 또 오기로 덤볐다’이다. 이 오기가 바로 프로 정신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드나.


“그 순간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나중에 영상을 보고야 내가 이랬구나 알았다. 링에 누워있다가 일어나는데 내 고개가 안 꺾였더라. 그건 제대로 맞아서 쓰러진 게 아니라는 거다. 왜? 내가 도끼질을 많이 해서 하체 힘이 좋았거든.”


-도끼질을 했다고?


“내게서 챔피언 벨트를 뺏어간 사모라가 연습할 때 도끼질하면서 체력을 키웠다기에 적의 전술을 따라 해 봤다. 통나무 한 묶음 사서 매일같이 도끼질을 했다. 통나무를 팰 때마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근데 그렇게 쓰러지면 뇌가 괜찮은가. 세세한 날짜, 군번까지 외는 걸 보면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적당히 맞으면 머리가 나빠지는데, 나처럼 진짜 많이 맞으면 제대로 다시 돌아온다. 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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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4전5기' KO승을 거둔 홍수환(오른쪽)이 공항에 마중나온 어머니와 함께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조선일보 DB

◇링에선 내가 이겼지만, 인생의 챔피언은 그였다

홍수환과 카라스키야는 명승부가 열린 지 40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한다. 홍수환의 40년 전 타이틀전 승리를 기념해 2016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서다. 카라스키야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고, 둘은 뜨겁게 포옹했다.


-카라스키야가 “홍수환에게 당한 KO패의 충격 때문에 은퇴했다”고 하더라.


“21세 이른 나이에 은퇴한 그는 정계에 입문했다. 1997년 파나마의 산 미겔리토시(市) 시의원과 2004년 시장을 거쳐, 2014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순간마다 홍수환이 다시 일어나 주먹을 날렸다. 패배한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고, 이후 심리적으로 흔들려 링을 떠났다’고 하더라.”


-경기 이후 처음 재회한 건가.


“그 몇 해 전 방송사 프로그램으로 내가 파나마에 가서 만난 적이 있다. 50번을 싸웠어도 죽어도 다시 만나기 싫은 선수가 있다. 치사하게 경기하는 선수들이 있거든. 눈 찢어졌을 때 눈만 때리는 치사한 놈들. 그런데 카라스키야는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때 그가 시의원으로 출마했을 때라 선거 캠페인도 같이 뛰어줬다. 그 뒤로 형 동생 삼았다. 이 친구가 한국 식당에서 김치도 즐겨 먹는다.”


-경기에서 졌는데도 그는 파나마의 영웅이다.


“그런 건 우리가 정말 배워야 된다. 내가 만약에 장충체육관에서 그를 네 번 다운시키다가 마지막에 KO패 당했으면 어땠을까. 지금까지도 ‘저 죽일 놈’ 취급받고 있을 거다.”


-자신이 패배한 경기의 40주년을 축하해주러 먼 길 온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래서 내가 그를 존경한다. 반대로 내가 그렇게 졌는데 40주년 기념식을 한다고 부르면 가서 축하해줄 수 있었을까? 나는 죽어도 안 갔을 것 같다. 링에선 내가 챔피언이었지만, 인생에선 카라스키야가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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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홍수환의 40년 전 타이틀전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에서 재회한 홍수환(왼쪽)과 카라스키야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모습. /홍수환 제공

◇누구도 완전한 인간은 없다

홍수환은 “링보다 인생이 더 무섭더라”고 했다. 1970년대 최고 인기 가수 중 한 명이었던 옥희와의 스캔들로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다. 첫 부인과 이혼, 옥희와 결혼, 구타 사건, 이혼, 재결합…. 지금은 옥희씨에게 완전히 잡혀 산단다. 그는 “인생사 다 풀어놓으려면 2박 3일 잡아야 한다. 은퇴 후 알래스카 갔다가 LA로 넘어가서 10년간 안 해본 일이 없다. 모자 팔고, 신발 장사 하고, 자동차 세일즈 하면서 인생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지금은 옥희씨랑 행복하신가.


“(웃으며)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에게 빨간 권투 장갑을 선물해 화제가 됐다.


“잘 보관하고 계신 것 같더라.”


-왜 그를 지지했나.


“이재명 후보가 되는 건 막아야 했으니까. 툭하면 거짓말하고 살인자 조카를 변호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로 나올 수가 있나.”


-취임 6개월이 지났는데 윤 대통령이 잘한다고 생각하나.


“조금 더 지켜봐야지. 섣부르게 실망해선 안 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왜 그렇게 비판했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태극기를 안 들고 북한에 갔다. 그런 대통령을 어떻게 지지하나.”


-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은 없나.


“없다. 정치를 떠나서 나는 위선 떠는 집단이 싫다.”


-복싱을 흔히 인생에 비유한다.


“사각 링 안에서 12라운드 36분, 쉬는 시간 12분, 총 48분 동안 때리고 막고 피해야 한다. 쓰러져서 기절하고 싶어도 기절하지도 않지, 공은 울리지, 시간은 흐르지, 도망치거나 포기할 수도 없지. 인생과 똑같다. 버텨야 기회가 오는 것도. 권투하면서 내가 깨우친 건 하늘은 누구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거다. 펀치가 세면 맷집이 약하거나 순발력이 떨어진다. 펀치는 좀 약해도 끈기 있게 버티면서 상대의 허점을 낚아챌 순발력이 있으면 언제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복싱에서 두 번이나 챔피언을 따냈는데, 인생에서도 챔피언이라고 생각하나.


“복싱은 엄지 척 ‘챔피언’이었고, 인생은 아직까지 ‘첨피언’이다. 챔프가 아니고 첨프(Chump·멍청이라는 뜻). 내가 사인할 때는 한글로 ‘참피온’이라고 쓰는데, ‘참고 피하고 온순하라’는 뜻이다, 하하!”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