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부여에서 꽃은 떨어지지 않으리
부여는 1500년 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도시다. 538년 백제 성왕은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조선의 적장자 부여를 계승한 유일한 나라라는 뜻으로 ‘남부여’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부여를 체험하는 색다른 여행을 떠나보자.
부여 백마강 상공을 날고 있는 열기구. 맑은 날 아침해가 떠오를 즈음에는 거울같은 강물 위에 비친 열기구 모습이 장관이다. 부여군청 제공 |
●백마강 하늘엔 열기구, 강물엔 수륙양용차
“이 강 이름은 원래 금강인데, 부여군을 지나는 16km 구간을 백마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백마강으로 입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는 백마강 둔치에는 은빛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백제’라고 쓰여진 깃발이 나부끼는 강변을 달리는 백마강 수륙양용버스 안 스피커에서 갑자가 스펙터클한 음악이 터져나왔다.
부여 백마강교 밑을 지나가고 있는 수륙양용버스. |
“우와~” “오~!”하는 승객들의 함성과 함께 버스는 백마강 푸른 물에 첨벙! 하얀색 물보라가 유리창까지 튀어올랐다. 버스 뒷쪽에 붙어 있는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자 버스는 배로 급변신한다. 버스가 물살을 가르자 백마강엔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수륙양용버스는 배처럼 ‘V자형’ 용골이 없어 바닥이 평평하다. 그래서 배의 수평균형을 맞추는 시간을 잠시 갖는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왼쪽 좌석에 있던 승객 한명이 오른쪽으로 옮기니 좌우균형을 맞춘다.
수륙양용버스는 곧바로 부소산성 방향으로 항해한다. 해발 106m의 부소산성은 평소에는 사비성의 후원이지만, 전쟁시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백제가 멸망할 때도 낙화암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멸망해가는 나라와 함께 몸을 던졌다. 절벽에는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이 쓴 붉은 ‘낙화암(落花巖)’ 글씨가 선명하다. 버스는 백마강 상류로 유턴해 백제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귀족회의를 열었던 정사암(政事巖) 부근까지 올라간다. 계백장군의 말 안장을 모티브로 세워진 금강의 ‘백제보’도 보인다.
백마강에 황포돗배 유람선도 있지만, 수륙양용버스(3만원)는 국내에서 백마강에서만 운행되는 이색적인 교통수단이라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국내업체가 제작했다는 수륙양용버스의 핸들은 두 개다. 육상을 달릴 때는 정면에 있는 핸들로 운전하고, 물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는 선박용 키를 잡고 배를 몬다. 운전자는 대형버스와 선박 면허 2개를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백마강의 평균 수심은 약 5m. 수상에 들어갔을 때 버스는 앞쪽은 1.2m, 뒤쪽은 1.4m가 물에 잠긴다. 뒤쪽에 수상엔진이 있어 무거워 앞쪽이 약간 들려 있는 상태에서 떠간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버스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다고 신고도 많이 했다고.
백마강교 밑에서 2대의 수륙양용버스가 교차했다. 경적소리 대신 ‘부우웅~’ 뱃고동 소리를 내며 신호를 하자 양쪽 승객들이 서로 손을 흔들어준다. 백마강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 황금빛으로 빛난다.
백마강 강물에 수륙양용차가 다닌다면, 하늘에서는 열기구가 떠다닌다. 백마강 상공을 7~8km 비행하며 낙화암, 궁남지 등을 구경하며 30~50분 정도 비행하는 ‘부여하늘날기(Skybanner)’. 서울 여의도 공원에 줄에 매달려 최대 130m 높이까지 올라가는 계류형 열기구가 있지만, 백마강에선 진짜 바람을 타고 자유비행하는 열기구가 운행된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나 호주 멜버른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열기구다.
열기구를 타기 위해 오전 6시반에 백마강 캠핑장에 도착했다. 둔치에 7층 건물 높이의 대형 열기구가 바람이 빠진채 누워 있었다. 약 20~30분 동안 풍선의 입구 쪽에 대형 선풍기로 바람을 집어 넣고, 가스불을 켜서 공기를 데우는 작업을 한 끝에 풍선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빨리 타세요. 풍선 날아가요. 빨리 타세요~!”
열기구를 줄에 매어 붙잡고 있던 직원들이 소리쳤다. 풍선 속에 데워진 공기가 팽창하면서 금방이라도 떠오르려고 들썩이고 있었다. 탑승용 바구니 한쪽의 벽면에 발을 디디며 힘겹게 올라탔다. 밧줄을 놓자 열기구는 백마강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백마강 위를 낮게 날고 있는 열기구. 부여하늘날기 제공 |
‘인간 드론’이 된 느낌이었다. 드론을 날릴 때 휴대폰 화면으로 보였던 장면을 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 구름과 산, 논밭과 골프장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고요하다는 것. 엔진이나 모터소리도 없이 산들산들 날아가는 열기구에서는 새소리 바람소리만 들렸다. 가끔씩 열기구 상승을 위해 가스불을 켜는 소리를 빼곤. 우리가 탄 열기구는 산을 넘고, 롯데스카이힐부여CC 골프장 그린을 지나 주차장에 안착했다. 백마강 열기구는 구름 낀 날엔 운해 위로 날기도 한다. 바람이 쎄거나 날씨가 안좋으면 결항이 잦고, 비싼 가격(1인당 18만원)은 단점. 그래도 해외에서만 즐길 수 있는 열기구를 탈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장소라 평생 한번은 타볼만 한 경험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부여
코레일관광개발은 유네스코세계유산 도시인 부여와 공주를 여행할 수 있는 기차여행 코스를 내놓고 있다. 템플스테이와, 휴양림, 캠핑장, 수륙양용버스, 열기구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그 중에서 꼭 빠질 수 없는 것이 국립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 부소산성, 왕릉원, 궁남지 등 백제의 화려했던 사비시대 유적지 탐방이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사진이나 복제품으로만 보던 백제금동대향로의 실체를 마주하니 온 몸이 전율할 듯 감동이 밀려온다. 금동대향로 속에는 1500년 전 백제의 산천과 계곡, 강과 바다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높이 61.8cm, 무게 11.85g의 대향로 꼭대기엔 봉황새가 앉아 있고, 그 밑에는 5명의 악사가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의 산과 계곡엔 호랑이와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와 상상의 동물들이 뛰어놀고, 도인이 산으로 걸어들어간다. 아랫쪽에는 연꽃과 수중생물이 살고 있고, 용이 향로를 받치고 있다. 용에서 나온 입김이 연꽃을 피워내고, 그위에 세상이 펼쳐지는 불교의 연화화생(蓮華和生)과 도교의 세계관이 결합된 작품이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겔의 풍속화처럼 백제가 3D 입체로 구현돼 있는 듯하다. 스마트폰 줌렌즈를 사용해서 금동대향로의 부분 부분을 확대해서 살펴보며 숨은그림 찾기 놀이를 하다보면 한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부여 왕릉원에 가면 능산리 사찰유적지 바닥에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있다. 진흙 속에서 뚜껑이 분리된 채 발견됐던 향로가 유리 진열장 속 묻혀 있다.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땅을 파고 보물을 숨겨놓았던 이의 마음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하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사비성의 중심부 왕궁의 사찰이었던 정림사지에서는 주민들이 그저 ‘백제탑’이라고 부르는 5층석탑이 있다. 높이 8.33m의 장중한 화강암 돌로 만든 탑인데, 나무로 깎은 듯 세련된 모습이다. 살짝 들려진 지붕선은 어깨만 살짝, 손가락만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제대로 그루브를 살리고, 바이브를 타는 고수의 춤선을 보는 듯하다. 백제의 미(美로) 알려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탑신부에 누군가 새겨놓은 수많은 글자들이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남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서기 660년 당 고종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다. 석탑은 비록 적군이 새겨넣은 주홍글씨로 온 몸을 둘렀지만, 사찰이 불타는 가운데도 살아남아 1500년 전 백제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가 ”비록 백제는 망하였으나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고 했던 것처럼,
롯데리조트 부여 ‘백상원’의 원형 한옥회랑. |
●가볼만한 곳=롯데리조트 부여 ‘백상원(百想園)’은 백제 ‘산수문전(山水紋塼)’에서 모티브를 따온 유선형 곡선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충남 부여 궁남지 부근에 있는 찻집 ‘백제향’에서는 연꽃차와 대추차를 마실 수 있다. 지난 여름 수확했다 냉장고에 얼려놓았던 연꽃 위에 따뜻한 찻물을 부어가며, 한잎한잎 정성스레 연꽃을 피워낸다. 연꽃차는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을 눈으로 먼저 즐기고, 은은한 연꽃향을 코로 즐기고, 다음에 입으로 차를 마신다.
부여 궁남지 인근에 있는 찻집 ‘백제향’의 연꽃차. |
부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