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요리, 감칠맛 돋보이는 세이버리 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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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식재료 활용한 칵테일… 상상을 뛰어넘는 메뉴로 인기

‘참 제철’ 3개월마다 새 칵테일

식재료에 관심 갖는 바텐더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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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진 바텐더가 오픈한 서울 종로구 사직로의 바(BAR) ‘참 제철’의 칵테일들. 이곳에서는 한국의 제철 재료를 활용한 칵테일을 3개월에 한 번씩 선보이고 있다. 왼쪽 칵테일부터 ‘팔로마(Paloma) 인 시즌’, ‘마르티네즈(Martinez) 인 시즌’, ‘모스코 뮬(Moscow Mule) 인 시즌’. 김유경 푸드디렉터 제공

하이볼 잔에 얼음을 채운다. 50mL 보드카와 10mL 레몬즙, 5mL 심플 시럽, 100mL 토마토 주스, 호스래디시 소스 그리고 20mL 김치 국물과 타바스코 한두 방울을 넣어 셰이킹한 뒤 잔에 따르고 김치와 피클, 레몬, 고춧가루를 올려 마무리한다. 이는 영국 런던에 있는 한 외국인 바텐더가 개발한 ‘김치 블러드메리’ 칵테일을 만드는 방법이다. 언뜻 보면 무슨 김치를 칵테일에 넣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바텐더가 선택한 맛의 비법은 다름아닌 김치와 고춧가루의 맛이다. 김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새콤함과 시원함, 매콤함은 칵테일의 맛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바텐더만의 킥이다. 런던 중심가에 있는 ‘Mexican Seoul’ 매장에서 타코, 버펄로윙과 함께 꽤 잘나가는 시그니처 메뉴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는 섹스온더비치, 준벅, 코스모폴리탄 등과 같은 달달한 칵테일이 인기였지만 2024년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칵테일 트렌드는 다양하고 이색적인 식재료를 활용한 세이버리(Savory) 칵테일이다.


미식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아시아 50 베스트(Asia’s 50 Best)’는 매해 아시아 지역 최고의 레스토랑과 바를 50개씩 선별해 시상하고 있다. 미슐랭가이드 책자는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다고 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고 인지도도 높지만 사실 요즘 미식가들이 사랑하는 맛의 동향은 아시아 50 베스트를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지난달에는 2024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시상식을 서울에서 진행해 2000명이 넘는 외국인이 한국을 찾았다. 선정된 레스토랑의 셰프와 바텐더는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으며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


아시아 50 베스트 바로 선정된 곳들의 칵테일을 살펴보면 한 가지 큰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세이버리 칵테일이라는 점이다. 세이버리는 사전적으로 맛 좋은, 향긋한, 풍미 있는 또는 즐거운, 기분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앤드토닉, 마티니, 올드 패션드 같은 클래식 칵테일도 꾸준히 잘 판매되고 있지만 메뉴판 앞쪽에 있는 시그니처 칵테일은 레스토랑의 요리보다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이버리 칵테일들이다. 게스트 입장에서도 바에 방문했을 때 평소 좋아하는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즐기는 것보다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추천해 달라고 물어보면 이제껏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메뉴들이 있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


아시아 50 베스트 바로 선정된 서울 ‘ZEST’의 시그니처 칵테일 중 하나인 ‘소이 카라멜’은 버터를 머금은 버번 위스키와 숙성 럼에 숙성 간장과 비정제 설탕을 넣어 짭조름하고 달달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바 ‘르챔버’의 ‘이탈리안 샐러드’는 보드카에 토마토, 레몬즙, 드라이 베르무트, 계란 흰자를 넣어 만든 칵테일로 신선한 토마토 샐러드를 먹는 듯한 상큼한 맛이 인상적이다.


아시아 50 베스트 바 13위에 오른 서촌의 바, ‘참’의 임병진 바텐더는 최근에 ‘참 제철’이라는 바를 오픈했는데 그곳에서 먹은 칵테일은 이제껏 먹어본 칵테일 중에서 충격적으로 맛있고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한국의 제철 재료를 활용한 칵테일을 3개월에 한 번씩 선보이고 있는데 ‘팔로마 인 시즌(Paloma in Season)’이라는 칵테일은 배추를 인퓨징한 테킬라를 기주로 사용하고 젖산을 발효한 자몽 주스, 직접 만든 고추장 시럽, 라임 주스로 맛을 낸 뒤 얇고 바삭하게 말린 배추김치를 가니시로 올려 마무리했다. “위스키보다는 테킬라나 진, 산미가 있는 칵테일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니 바텐더가 추천해 준 칵테일이었는데 단맛, 짠맛, 신맛, 새콤한 맛에 매콤한 맛까지 빈틈없이 꽉 차 있는 맛이었다. 칵테일 재료를 보고 처음에 의아해한 건 사실이지만 동치미 육수를 그릇째 들고 마시는 사람처럼 칵테일 한 잔을 홀랑 비워 버린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저녁을 먹고 가지 않았음에도 이 칵테일 한 잔을 마시니 간단한 요리를 먹은 듯한 기분이 들어 어느 정도 포만감까지 들었다. 말로만 듣던 세이버리 칵테일의 묘미였다.


팻워싱(Fat-Washing)이라는 방식이 최근 많은 바텐더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칵테일에 고체 성분인 동물성 지방을 사용해 풍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베이컨, 버터, 오일 등을 활용해 지방을 알코올에 섞어 냉동고에 충분한 시간 동안 인퓨징하면 지방 특유의 향과 맛을 알코올에 녹일 수 있다. 코코넛 오일, 참기름처럼 그동안 칵테일을 만들 때 잘 사용되지 않았던 독특한 풍미를 내는 식탁의 재료들이 바텐더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맛으로 탄생하고 있다.


도수가 높지 않은 술, 실험적인 맛, 도전적인 레시피, 하이볼처럼 술에 각자가 원하는 음료를 넣어 만드는 믹솔로지 문화가 20∼30대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세이버리 칵테일은 앞으로도 꾸준히 인기를 누릴 것으로 기대된다. 바텐더들도 셰프만큼 식재료에 관심을 갖고 재료의 맛을 저글링할 수 있어야 시대의 변화에서 살아남을 것 같다.


김유경 푸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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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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