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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향한 사랑

by한겨레

(17) 모두의 비난을 받는 존재를 그린다는 것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로 미움 받던 ‘마담 보바리’에 대한 혐오

차별과 오해 받던 인물을 공감의 대상으로 바꾸는 ‘문학의 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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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벌려 환영받기 어려운 주인공이 있다. 영광의 이름보다 치욕의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비극적인 주인공. 이 주인공은 아마도 역사상 온 세상의 욕을 가장 많이 먹은 작품 속의 주인공일 것이다.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다. 보바리즘,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이즘’(ism)의 대상이 된 독특한 경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바리즘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니다. 사치와 허영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사람, 결단코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사람, 과소비에 치명적으로 중독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보바리즘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과연 보바리즘은 마담 보바리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명칭일까. 마담 보바리에 대한 편견을 진심으로 완전히 내려놓고 이 책을 읽으면, 보바리즘은 마담 보바리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바리즘은 오히려 마담 보바리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것이다.


퀴어는 오해받고 소외당하는 모든 사람


보바리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한 번도 그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으면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보바리즘’은 그의 고통을 한 치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마담 보바리는 사랑받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열망을 너무 솔직하게 표현해버려 지탄받는 것이 아닐까. 교양 있는 척하는 사람들은 우아하고 세련되게 그 욕망을 숨기지만, 오직 책밖에는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없었던 시골 마을의 여인 에마 보바리는 그런 복잡한 페르소나를 길러내지 못했다. 모두에게 오해받는 사람, 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 에마 보바리를 다시 이해하고 싶어지게 만든 사람은 이 작품의 작가 플로베르였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에마 보바리, 그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작가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마담 보바리. 그건 바로 나야.”(Madame Bovary, c'est moi.)


‘내가 바로 마담 보바리다’라는 그의 외침은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변형된다. 내가 바로 퀴어(queer)다. 내가 바로 가장 비참한 마이너리티다. 내가 바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참혹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단독자다. 퀴어는 단지 성소수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오해받으며 소외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플로베르는 사치와 불륜에 빠져 인생을 망쳐버린 여성의 대명사가 되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던 에마 보바리를 그렇게 구해낸 것이 아닐까. 에마 보바리는 작가 플로베르를 통해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 이해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결국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는 생각, 우리 모두가 공감할 가치가 있는 생각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후미진 이야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따스한 이야기로 바꾸는 힘.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누구도 응원하지 못했던 그 여자, 외롭고 비참하게 미쳐가고 있던 그 여자 에마 보바리를 온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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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대의 사람들은 왜 그토록 마담 보바리를 미워했던 것일까. 마담 보바리는 우리 안의 영원히 사랑받고 싶은 마음, 아름다운 장소와 아름다운 사물과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은 불가능한 환상을 자극하는 인물이기에, 사람들은 마담 보바리를 그토록 치명적인 위험인물로 낙인찍었던 것이 아닐까. 에마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욕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눈부신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열망이야말로 자기 안의 위험한 욕망이기에. 플로베르는 그렇게 우리 안의 영원히 이해받지 못한 마담 보바리의 욕망을 불러 깨운다. 이 작품의 두 가지 키워드, 즉 ‘금지된 연애’와 ‘과도한 소비’가 약속하는 현란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비루한 일상을 완전히 감쪽같이 포장해버리고 싶은 그 숨은 열망을, 마담 보바리는 온몸으로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마담 보바리는 우리 안에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 또 하나의 허영심 많고 사랑받고 싶은 내면 아이(inner child)를 일깨운다. 끝없이 다른 곳을 꿈꾸는 자 에마 보바리는,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직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미래의 나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동지이다. 소박하다 못해 지루하고 심심한 시골 마을에서 자라난 마담 보바리는 파란만장한 것들, 드라마틱한 것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설렘에 매혹된다. 바다가 좋은 이유는 오로지 폭풍우 때문이며, 초목은 오직 폐허 속에 드문드문 돋아나 있을 때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에게는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며 명상에 잠기는 삶 따위는 눈길을 끌지 못한다. 항상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욕망하는 에마. 삶을 멋진 로맨스 소설 속의 환상으로 수놓으려다가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그 여자, 에마 보바리. 사람들은 증오했다. 결코 치유할 수 없는 허영을 영원히 포기하지 못하는 에마의 멈출 수 없는 욕망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존재를 공감의 대상으로


이제는 에마 보바리의 열망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몇백 걸음만 가면 ‘동네의 끝’이 가늠되는 그 좁디좁은 마을에서, 에마는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로 자신의 좁디좁은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에마 보바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의 울타리를 참을 수 없었다. 운명처럼 주어진 세계 그 너머를 욕망했지만 그 너머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랑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아름다운 것들로 나의 장소들을 채우면, 그 너머를 향해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온갖 빚을 끌어와 그 아름다운 물건들을 사들이고 나니, 그가 지닌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낯선 연인의 사랑을 얻고 나니, 에마는 차가운 세상의 시선 속에서 비난받고 저주받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어져버린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어린 시절 <마담 보바리>를 처음 읽었을 때는 결코 눈에 띄지 않던 인물이 이제야 눈에 띄기 시작한다. 바로 마담 보바리의 남편 샤를이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남자. 아름다운 아내 에마를 사랑의 대상으로도, 진정한 대화의 상대로도 생각하지 않는 남자. 작가마저 깜빡 잊어버린 듯한 존재. 독자는 더욱 깜빡 잊어버리기 쉬울 뿐 아니라 궁금해하지도 않는 존재, 마담 보바리의 남편 샤를은 지루하고 시시하며 아무런 욕망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욕망은 딱 하나였다. 에마 보바리의 좋은 남편이 되는 것. 처음부터 그녀를 짝사랑했던 샤를은 단 한 번도 에마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마담 보바리>의 마지막을 이끄는 주인공은 뜻밖에도 에마나 그의 연인들이 아니라 한 번도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한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 남편이다. 그는 아내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를 처참하게 버린 남자 로돌프를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샤를은 아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적극적인 자살이 아니라 마치 삶의 이유가 깡그리 사라져버려 저절로 영혼이 육체를 떠나가버리는 듯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사람도 있구나.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자의 죽음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 그것은 바로 사랑에 빠진 작품 속의 주인공과 그 인물을 그려낸 작가가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 아닐까. 생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편의 성으로 불린 ‘마담 보바리’, 그녀의 진짜 이름은 ‘에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영원히 이해받지 못했지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한 사람의 소중한 인간’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여자, 외롭고 비참하게 미쳐가고 있던 그 여자 에마를 온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죽음,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슬픔,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고통의 편에 서서 결코 그의 마지막 동지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힘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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