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공평하게 친절했지만 권력자에 당당했던 ‘우래옥 지킴이’

[푸드]by 한겨레

58년 최장수 ‘카운터 매니저’ 김지억 은퇴


‘평냉’ 맛 지킨 그의 철학 궁금


그를 둘러싼 재미난 ‘평냉’사…들을수록 쫄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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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먹거리가 있다. 그런 음식에 우리는 ‘솔푸드’라고 명명한다.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이겨낸 솔푸드엔 고고한 위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품위는 지킴이들의 노고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인 솔푸드는 무엇일까? 평양냉면을 꼽는 이가 많을 게다.


평양냉면 식당 우래옥. 우래옥에도 지킴이가 있었다. 무려 58년이다. 전무 김지억(87). 아니다. 이젠 ‘전’ 전무다. 그는 올해 5월께 은퇴했다. 아마도 한국 외식업계 최장수 ‘카운터 매니저’의 퇴장일 것이다. 소식을 들은 요리사 박찬일은 “평양냉면 원조 세대의 마지막 퇴장이라서 충격적”이라며 “다들 냉면, 냉면 하면서 그것을 이끈 이는 이렇게 묻히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김씨를 지난달 19일 그의 집에서 만났다.


“이거 보라오. 면을 이런 식으로 잡아야 (면 통째로) 안 들리고 젓가락을 (면 사이로) 넣었을 때 잘 풀린다고. 요즘 이렇게 안 해.” 김씨는 손수 기자의 스카프를 이용해 냉면 면을 제대로 마는 법을 보여줬다. 축이 된 한 손에 다른 손이 적당히 잡은 면을 갖다 붙이는 식이다. 한 번에 돌돌 말아 똬리처럼 만드는 것보다 수고가 든다. 그의 나지막한 어조에는 고향 평양의 흔적이 묻어 있다. 사소한 일로 취급하는 면 사리 마는 법조차 식당 품격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우래옥 식구들은 그의 무뚝뚝한 잔소리를 더는 듣지 못한다.


“코로나가 난리였잖아. 마스크 쓰고 앉아 있으려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고, 애들(자식들)도 이젠 나가지 말라고 하고.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 주면 안 되잖아.” 그는 1962년 입사한 우래옥에 마침표를 찍었다. “처음엔 고저 힘들었어. 매일 나가던 데를 못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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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에는 한국 현대사와 우리 음식사가 중첩돼 있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가지 않으려고 숨어 있다가” 단신으로 남하했다. 1952년 우리 나이로 스무살 때 일이다. 현역 군인이 되려고 들어간 부대는 공교롭게도 미군 첩보부대였다. 6개월간 첩보 교육을 받은 후 그는 생각했다. “북파 공작원 뭐 그런 거 시킬 텐데 그건 못 하겠어.” 그길로 나와 바로 공군에 입대해 8년을 일했다.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그해 중사로 전역한 그는 조달청에 들어갔지만, 오래 일하진 못했다. 이듬해 터진 5·16 군사쿠데타 여파가 우래옥에도 닥쳤다. “(우래옥) 남자들이 다 군대 끌려간 거야. 그때는 군대 안 가려고 식당 같은 데 숨어 있는 이가 많았거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사회악 일소’란 명분을 내세워 병역 기피자, 조직폭력배 등을 잡아들였다. 우래옥 남자들도 독재의 서막을 알리는 강권을 피할 순 없었다.


우래옥은 평양에서 명월관이란 이름의 식당을 운영했던 장원일(1972년 작고)·나정일(1985년 작고) 부부가 1946년께 서울에 문 연 식당이다. 본래 이름은 서북관. 한국전쟁 발발 후 잠시 문 닫았다가 다시 열면서 지금의 이름 우래옥(‘다시 찾아온 집’이란 뜻)을 얻었다.


“창업주의 며느리가 내 당고모였어. 사촌들은 전쟁 전에 서울에 와 있었지. 당고모가 제발 와서 ‘카운터 좀 봐주라’ 사정을 하는 거야.” 우래옥 남자들이 떠난 빈자리는 컸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카운터’ 업무다. 카운터를 맡은 이는 식당이 잘 돌아가도록 주방, 홀 등을 관리하며 손님 응대 등 서비스까지 챙겨야 했다. 입사한 그해 박정희는 화폐개혁을 한다. 그가 받은 첫 월급은 5000원. “냉면 35원, 불고기 1인분이 60원 했지. 직원들 월급은 1000~1500원이었어.” 그가 반추하는 지난 시간은 현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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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미식이 일상이 되면서 주방장의 사회적 지위도 오르고, 잘되는 식당은 투자가가 서로 나설 정도가 되었지만, 그 시절엔 달랐다. “처음 일할 때 아는 이라도 오면 숨었어. 여관, 술집, 밥집 하는 이, 어디 사람 취급 했나.” 한국 음식사의 한 자락이다.


우래옥 평양냉면 맛은 주방장이 냈지만,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엔 그의 검사가 한몫했다. 그는 매일 육수 맛을 점검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끼니마다 평양냉면을 먹었다. “그렇게 많이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찬 거 먹기 싫어.” 그가 웃는다.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지금 창경궁) 시절, 봄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우래옥은 인산인해였다. 하루 2000그릇이 뚝딱 팔렸다. 서울 구경 온 이 대부분이 찾던 데가 창경원과 우래옥이었다. 맛이 담보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창경원 근처에 있다 해도 손님이 찾을 리 없다. 우래옥 육수 비결은 뭘까?


“닭고기, 돼지고기 넣은 적도 있었지. 그건 잠깐이고, 지금까지도 소고기만 써. 순수한 고깃국물에 양념 조금 친다고. 별거 없어.” 궁극의 맛은 가장 단순한 조리법에서 탄생하는 것인가. 냉면 사리를 살살 휘저으면 하얀 백김치를 만났다. “매일 담갔지. 면에 식초, 국물에 겨자 넣어 새콤하게 먹어야 맛있어.” 지난해 작고한 ‘평양냉면 장인’ 김태원(1937~2019) 조리장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창업주 할아버지가 명월관 시절 데리고 있던 요리사 둘한테서 일을 배웠어. 아주 잘했지. 우리(우래옥)는 이상해. 면 만지는 사람은 면만 만지고, 고기 만지는 사람은 고기만, 고명 만지는 사람은 고명만 만졌지.” 지금 식당 시스템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김태원 조리장은 발군의 실력자였던 것이다. 최고의 ‘카운터 매니저’가 ‘최고의 조리장’을 기억하는 건 만유인력만큼 당연해 보인다.


우래옥 맛이 전국을 강타하자 재미있는 일도 벌어졌다. “한번은 사리만 떼는 이가 고급 고깃집으로 뽑혀 갔는데, 알고 봤더니 그가 잠깐 쉬러 주방 밖에 나갔다가 그 고깃집 사장을 만난 거야. 그 사장이 주방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대. 대뜸 그이가 ‘내가 주방장이다’ 한 거야.” 그가 활짝 웃었다. 깊게 팬 볼 주름이 더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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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침 없이 제 일을 훌륭히 이어간 건 나름의 철학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당당하다.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일 때 우래옥에 오면 바지에 손 넣고 응대한 그다. 권력에 기죽지 않았다. “그이가 (평양냉면) 먹는 홀엔 나만 들어갈 수 있었지.” 빛바랜 영화 한 편이 지나갔다. 손님의 불평에도 원칙이 있다. 대책을 바로 마련해 시행했다. 한번은 정부 고위직이 왔다가 서비스로 주는 종이컵 커피를 받아들고는 불평했다. 종이컵 따위에 커피를 준다며 대접이 형편없다고 날선 소리를 질렀다. 그길로 홀에 커피 자동판매기를 설치했다. 식당 성공의 핵심은 친절이라는 원칙도 늘 강조했다. “단골은 팁도 주고 하니 (종업원이) 더 친절하게 대하게 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처음 오는 이 다 친절하게 대해야지. ‘공평하게 친절하기’ 중요해.” 궁극의 성공은 가장 단순한 매너에서 완성되는 것인가.


이런 그가 창업은 왜 안 했을까? “용문산 아래 땅을 사서 할 뻔했지. 알고 봤더니 길가도 아니고 산인 거야. 식당 못하지. ‘나는 이 길은 아니구나’ 하고 그 이후로는 다른 생각 한 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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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억씨가 28살에 찍은 사진. 박미향 기자

6남매의 다섯째였던 그. 실향민의 설움이 그에게 있다. 하지만 ‘남북 이산가족찾기’에 신청한 적이 없다. “신청하면 북에서 식구들을 찾을 거잖아. 남반부로 도망간 반동 가족이라고 고초 겪을 거 같았지.” 늘어진 눈꺼풀 아래로 살짝 비친 눈물방울이 그의 심정을 알려줬다. 나이가 드니 더 그리운 이들이 가족이란다. 겨울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말아주던 김칫국물 생각에 잠을 못 이룬다. 그가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곧 바스러질 듯한 얇고 누런 사진 한장이었다. “내래, 28살 때 사진이야. 나를 알아보겠어?”


노포(오래된 가게) 식당과 우리 솔푸드 평양냉면을 60년 가까운 시간에 꽁꽁 묶어서 지킨 그를 단박에 알아봤다. ‘네, 알아보겠습니다. 당신은 평양냉면 최고 지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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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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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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