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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포도로 만드는데…
채식주의자를 위한 와인은 따로 있다?

by중앙일보

必환경 라이프? 비건 와인


와인은 포도를 발효해서 만든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와인인 ‘비건 와인(vegan wine)’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다. 고기가 들어가지도 않는데, 채식주의자를 위한 와인이 따로 있다는 게 언뜻 잘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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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와인'은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한 동물성 재료도 사용되지 않는 와인을 말한다. 사진 rodrigo-apeu by unsplash

비건 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 와인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내추럴 와인’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내추럴 와인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와인, 즉 만드는 과정에서 최대한 인위적인 개입 없이 만드는 와인을 말한다. 내추럴 와인 입문서로 유명한 이자벨 르쥬롱의『내추럴 와인(NATURAL WINE)』에 따르면 “유기농법을 사용하는 포도밭에서, 병에 담는 과정에서 소량의 아황산염을 넣는 것(아예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외에는 아무것도 첨가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생산한 와인”이다. 다시 말해 옛날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발효된, 거의 포도즙에 가까운 와인이다.


기존 와인과 달리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내추럴 와인이 주목받으면서 자연스레 와인에 이런저런 첨가물이 들어간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첨가물 중 혹시 동물성 재료는 없을까. 이런 의문이 곧 비건 와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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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포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첨가물이 들어가는데, 모든 첨가물을 배제한 것이 내추럴 와인이고, 동물성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비건 와인이다. 사진 margarita-zueva by unsplash

동물 보호 단체 페타(PETA)에 따르면 비건 와인은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물성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와인”이라고 정의된다. 와인에 동물성 재료가 사용될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있다. 바로 와인을 정제하는 과정에서다. 포도를 발효시켜 만드는 와인은 정제하기 전에는 각종 유기물이 떠다녀 뿌옇고 탁한데, 우리가 마시는 깨끗한 와인을 얻기 위해선 이 부유물을 거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보통은 동물성 재료로 만든 청징제가 쓰인다.


청징제란 탁한 액체 속 부유물이나 입자를 응집해 제거하기 위해 첨가하는 물질이다. 청징제는 와인에 들어가 자석처럼 작용해 와인 속 불필요한 입자들을 끌어당긴다. 무겁게 가라앉은 청징제를 걸러내면 깨끗한 와인을 얻을 수 있다.


페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와인에는 동물성 청징제가 사용된다. 우유 단백질(카세인), 갑각류 껍질에서 나온 섬유(키틴), 달걀 흰자에서 추출한 단백질(알부민), 생선 부레로 만든 젤라틴 등 종류는 다양하다. 비건 와인은 이런 동물성 청징제 대신 벤토나이트나 카올린 같은 점토 기반 청징제나 식물성 카세인, 실리카젤, 활성탄 등을 사용해 와인을 걸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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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 과정에서 흔히 사용되는 동물 유래 성분을 사용하지 않는 와인이 '비건 와인'이다. 사진 myveganwines 인스타그램

비건 와인에 대한 관심은 동물성 음식을 피하고, 모피를 거부하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동물 보호를 실천하는 ‘비거니즘(veganism)’의 확산과 궤를 같이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9년을 ‘채식의 해’로 선언한 바 있다. 2019년 세계 트렌드로 채식을 제안하고 “사람들이 동물성 제품을 피하는 삶의 방식에 관심이 높다”며 “25~34세 미국인 중 25%가 채식주의자로 특히 밀레니얼 세대들 사이에서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먹고 입는 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을 지향한다.


사실 청징제는 와인 가공을 위한 보조제로 종래에는 모두 걸러져 와인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소량의 청징제가 와인에 흡수될 수 있고,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만드는 과정에서의 동물성 재료도 피해야 할 대상이 된다.


비건 와인은 국내에 이제 막 소개되는 단계다. 보통 채식 레스토랑에서 비건 와인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국내 채식 인구가 늘고 채식 레스토랑이 몇몇 생겨나면서 채식 메뉴와 함께 비건 와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비해 놓는 곳이 생겨났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채식 레스토랑 ‘몽크스부처’가 대표적이다. 약 25종의 비건 와인을 만나볼 수 있는 이곳에서는 최근 채식 메뉴를 주문할 때 비건 와인을 함께 주문하는 손님들이 꽤 많아졌다. 이문주 대표는 “채식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건 와인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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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남동의 채식 레스토랑 '몽크스부처'에서 판매하는 비건 와인들. 사진 몽크스부처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포인트 프레드릭’은 채식 메뉴의 비중이 높은 와인바로 비건 와인 4종도 함께 소개한다. 이곳 장서희 대표는 “비건 와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소량 구비해 뒀는데 꽤 많은 손님이 요청하고 있다”며 “사서 가져가고 싶다고 하거나 택배로 보내달라는 요청도 많은 편”이라고 했다.


물론 엄격한 채식주의만 비건 와인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채식 레스토랑의 손님 100%가 모두 채식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채식에 관심 있는 일반인도 비건 와인을 주문한다. 몽크스부처 이 대표는 “채식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요즘에는 비건이 아니어도 평소 일주일에 한두 번 외식할 때 비건 메뉴로 식사하고 비건 와인을 즐기는 플렉시테리언이 많다”고 귀띔한다.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은 주로 채식을 하지만, 가끔 고기나 생선도 섭취하는 유연한 채식주의자를 의미한다.


채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라기보다 호기심에서 비건 와인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비건 와인을 20여 종 정도 수입해 유통하는 ‘무디타와인’의 이승철 대표는 “시음회를 해보면 채식주의자라서 비건 와인에 관심을 갖는다기보다 다양한 와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즐겁게 시도해보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대표는 “최근 내추럴 와인 바람이 불면서 다양한 와인을 체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비건 와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내추럴 와인과 비건 와인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엄밀히는 다른 개념이다. 내추럴 와인은 산화 방지제인 아황산염을 비롯한 첨가물의 유무로, 비건 와인은 동물성 재료의 사용 여부로 판단한다. 동물성 청징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황산염 등 첨가물을 넣은 비건 와인도 있다.

유럽 연합의 비건 와인 인증. 통일된 인증기관은 없지만 유럽 연합과 이탈리아의 비건 인증이 통용된다. 사진 유승민 소믈리에 제공

비건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호텔에서도 비건 와인을 소개한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호텔은 3월 1일부터 비건 샴페인 6종과 비건 와인 2종을 선보인다. 여기에 채소 스튜인 라따투이와 구운 채소에 병아리콩 등을 넣은 팔라펠, 토마토 바질 타르트 등 채식 메뉴도 선보인다. 유승민 수석 소믈리에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친환경 와인 중 하나가 비건 와인”이라며 “강한 양념보다는 부드러운 오일이나 향긋한 허브 등을 넣어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과 함께하면 비건 와인을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다”고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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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호텔의 비건 페어링 메뉴. 사진 인터컨티넨탈 호텔

한국 채식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채식 인구는 약 150만명에 이른다. 전 세계 채식인구의 0.8%에 불과하지만, 이 숫자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국제채식인연맹(IVU)에 따르면 전 세계 채식인구는 1억8000만명에 달한다. 와인같은 식생활 속 세부적인 부분에서도 채식이라는 선택지가 생겨나고 있는 이유다. 채식 인구가 점점 무시할 수 없는 소비층이 되어가고 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