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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19)

방콕음식, 한입에 시고 짜고 달고 맵고…집콕생활 이겨낼 다양한 자극의 조화로다

by경향신문

태국의 맛


기계 아닌 절구에 카레 빻고 태국산 유기농만 고집하는 레스토랑과

수백년 된 요리책 연구하며 최고급 재료·기술로 태국요리 진수 알리는 셰프들

정통 태국음식 추구하며 외국인들과의 교류로 다문화적 맛과 포용력 음식에 담아내

이국적이고 동양 느낌 가득한 음식으로 발전…동서양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나라로

실의에 빠졌던 자영업 친구는 디저트 ‘카놈 투어이’ 먹고서 이렇게 외쳤다 “그래도 인생은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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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서교동의 태국 식당 ‘어메이징 타일랜드’의 쏨땀. 그린 파파야로 만드는 샐러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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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7년 CNN 선정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톱10’에 든 시큼한 새우탕 톰양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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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손님을 주방으로 불러서 내주는 ‘보란’의 첫 번째 코스. 맨밥 위에 소금, 종려당, 어린 코코넛 구이를 올렸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힘들어졌다. 오랜 ‘방콕(방에 콕 박혀 있기)’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이제 음식으로라도 여행 기분을 내보면 어떨까? 집에서 인터넷 쇼핑으로 구입한 재료로 외국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근처 외국 음식점으로 잠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음식으로 오감에 새로운 자극을 주다 보면 이 난리 통이 사그라들고 난 뒤 떠날 여행도 비로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시기를 조금 더 버티자는 의미에서 미식의 천국 태국 방콕으로 맛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다양하고 자극적인, 태국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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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란’의 메인 요리. 카레, 수프, 샐러드, 볶음 등의 7가지 요리가 태국식으로 한꺼번에 나온다.

2017년 미국 방송 CNN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인터넷 투표로 뽑았더니, 10위권에 태국 음식이 4개나 들어갔다. 시큼한 새우탕인 톰얌꿍, 볶음 쌀국수인 팟타이, 그린파파야 샐러드인 쏨땀, 코코넛 밀크와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고기 카레인 마싸만 카레가 그것이다. 태국은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이 발달했을까? 예로부터 먹을거리가 풍족했던 지리적 조건과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역사 덕이 크다. 인도, 중국 등 이웃나라들의 다양한 문화와 융합·통합을 거듭하고, 16세기 이후 아유타야 시대에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영향까지 받게 되면서 태국의 음식문화는 복합적으로 발달해왔다. 덕분에 태국인들은 음식을 몹시 즐긴다.


태국에서 공부하고 태국어과 교수로 일하며 <태국 다이어리, 여유와 미소를 적다>를 쓴 박경은과 정환승에 의하면, 태국음식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다양성’ 그리고 ‘자극적인 맛’으로 요약된다.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서 ‘향의 요리’라 할 정도로 다양한 향이 존재하며, 한 음식에서 신맛, 짠맛, 단맛, 매운맛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태국음식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자극적인 맛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본다. 톰얌꿍과 쏨땀이 대표적이다.


음식평론가 강지영은 <미식가의 도서관>에서 이렇게 썼다. 태국은 독립을 지켜온 역사와 강력한 왕권 덕분에 동남아의 색과 향을 가장 잘 유지하는 음식문화가 발달했다고. 이국적이고 동양의 느낌이 가득한 음식 덕분에 동서양인을 막론하고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폭발한 관광산업을 잘 이끌어온 태국 정부와 민간기업의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 대사관과 관광청은 각국에서 요리 강연과 시식회를 열었다. ‘블루 엘리펀트’라는 식당은 전 세계의 분점에서 한결같은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셰프들을 교육시켰고, 서비스와 인테리어까지 철저하게 관리해왔다. 태국 본점에서는 요리교실을 운영하며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태국요리를 가르쳤다. 덕분에 외국인 여행자들은 친숙하면서도 이국적인 음식이라는 태국음식의 이미지를 갖고 돌아갔고, 귀국 후에도 태국음식을 찾아 먹게 되었다.


2004년부터는 정부에서 ‘태국요리 세계화 프로젝트’(Kitchen of the World)를 추진해왔다. 이 프로젝트는 음식의 표준화, 음식점의 매뉴얼화, 국가가 주도하는 해외 태국 레스토랑 인증제인 ‘타이 셀렉트(Thai Select)’ 사업을 포함한다. 타이 셀렉트는 자격증을 가진 요리사가 현지 식자재로 음식을 만들어 태국음식의 정체성을 제대로 구현하는 음식점을 인증하는 제도다. 미쉐린 가이드북처럼 암행 방식으로 각 식당의 메뉴의 맛과 향, 식자재 등을 평가한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조금씩 바뀌는데, 200여곳의 태국 레스토랑 중 6~8곳 정도가 선정된다. 당연히 제대로 된 현지의 맛을 자랑한다.

태국음식도 역시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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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방콕 최고라 불리는 ‘사보이’ 레스토랑의 푸팟퐁커리. 한국인도 즐겨먹는 게요리다.

그렇다면 최고의 태국 레스토랑은 어떤 곳일까?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2020년 리스트에는 방콕의 레스토랑이 8개나 올라가 있다. 그중 태국요리를 내는 식당은 5곳인데, 보란(Bo.Lan)이 가장 순위도 높고 유명하다. 보란은 정통 태국요리를 표방하는 곳이다. 오너 셰프인 보는 2013년 아시아 최고의 여성 셰프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에도 태국의 대표 셰프로 등장한다. 보는 오프닝에서부터 강력한 ‘고집’을 보여준다. 태국은 서비스의 나라이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만, 자신의 레스토랑에서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다면 아예 오지 말라는 식이다. ‘진짜’를 보여주기 위해 전통 조리방식과 태국산 유기농 재료만 쓴다는 보의 고집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식당은 모든 카레를 직접 빻아서 만든다. 요즘은 다들 카레 페이스트를 기계로 갈아서 쓰지만, 절구에 빻는 것이 ‘정석’이라고 주장한다. 절구에서 빻으면 각 재료가 훨씬 더 잘 어우러지고 풍미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보가 수많은 시장과 태국 전역의 농장을 다니며 장인이라 할 만한 생산자들이 만든 100% 유기농 재료만 찾아 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보란의 테이스팅 메뉴는 이러한 재료의 풍미를 극대화해 보여준다. 식당에 방문해 테이스팅 메뉴를 주문하자, 손님을 주방으로 불러들여 첫 음식을 내주었다. ‘뒤집고 소금을 뿌려라’라는 이름의 음식은 숟가락 위에 맨밥을 얹고 그 위에 소금, 종려당(코코넛 설탕), 어린 코코넛 구이만 올린 것이었다. 태국의 주요 식재료를 한자리에서 보여주기 위한 셰프의 의도가 잘 드러났다. 메인 코스는 7가지 요리가 한꺼번에 나왔다. 태국요리에서는 카레, 수프, 샐러드, 볶음, 소스가 하나씩 오르는 게 기본이기 때문에, 코스별로 요리를 하나씩 내는 서양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보란의 가정집처럼 아늑한 공간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철학을 강하게 느꼈다. 외국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태국식으로 맵게 만든다더니, 메뉴 하나하나가 어찌나 매운지 물을 1ℓ 넘게 마셔야 했다.


10년쯤 전에 태국에서 하루짜리 요리교실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강사는 처음부터 “태국음식은 공장에서 나온 조미료, 특히 MSG가 엄청나다”고 비판했다. ‘MSG는 빼고 주세요’라는 문장을 연습시키기도 했다. 그 이후 태국음식이 가식적이고 몸에 나쁜 것 같아 두려움을 느꼈는데, 보란에서 태국음식의 진정성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온 나이 지긋한 태국인들은 어릴 때 자신의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음식 맛, 특히 진짜 고추와 소금 맛이 난다며 기뻐한다고 한다.


보가 이렇게 태국의 전통을 고집하게 된 것은 제대로 된 태국음식이 태국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가 방콕의 지중해 식당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한 외국인 셰프가 태국음식을 알고 싶다며 찾아왔다. 보도, 다른 태국인 수셰프들도 서양요리는 알았지만, 태국음식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당시 태국음식은 레스토랑 요리가 아니라 그냥 집에서 먹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는 런던에 사는 호주인 데이비드 톰슨에게 가서 태국음식을 배웠다. 톰슨은 태국에 여행을 왔다가 태국음식에 압도된 사람이다. 수백년 된 요리책들을 연구하며 ‘진짜 태국음식’을 만들려고 노력해왔고, 덕분에 태국음식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태국음식으로 최초의 미쉐린 스타를 받은 셰프로도 유명하다. 그 식당은 방콕의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있는 ‘남(Nahm)’이다.

한국에서 만나는 태국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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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발효된 쌀·볶은 쌀·표면을 그을린 양갱에 바삭한 쌀과자인 튀일을 얹은 ‘남’ 레스토랑의 디저트.

지금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태국인 여성 셰프가 귀국해 운영하고 있지만, 남은 여전히 수백년 된 요리책에 영향을 받은 고급 태국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대표요리인 미앙캄(Miang Kham)은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한입거리 애피타이저로 신선한 베틀후추 잎에 생강, 라임, 양파, 땅콩 등을 올려 먹는 쌈요리다. 민물새우, 그린 망고, 살라크(뱀피 같은 겉껍질로 스네이크 프루트라고도 불리는 열대 과일), 허브 등을 함께 싸 먹었는데 재료의 맛과 식감이 다양하면서도 조화로웠다. 밥과 함께 나온 톰얌꿍, 생선 카레, 생강과에 속하는 향신료 카다멈 순을 섞은 오징어 샐러드, 발효된 쌀·볶은 쌀·표면을 그을린 양갱에 바삭한 쌀과자인 튀일을 얹은 디저트는 모두 그때까지 알고 있던 태국음식의 맛이었으나, 최고급 재료와 테크닉 덕분에 고급 태국요리의 맛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메뉴였다.


방콕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보란과 남 모두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정통 태국음식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이력이 인상적이다. 이 두 곳 외에도 방콕의 레스토랑들은 요리의 콘셉트과 메뉴, 테크닉, 셰프의 커리어 모두 다문화적인 포용력을 자랑한다. 수많은 외국인 셰프들, 외국인 여행자들이 섞이며 방콕은 태국요리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요리가 발전하는 ‘월드 클래스 미식 도시’가 되었다.


한국에도 유명한 태국 식당들이 있다. 미쉐린 가이드북에 여러 해 소개된 서울 연남동 ‘툭툭 누들 타이’, 타이 셀렉트에 뽑힌 이태원 ‘어메이징 타이’와 서교동 ‘어메이징 타일랜드’는 주인과 직원들이 거의 태국인이다. 특히 ‘어메이징 타일랜드’는 태국인 손님도 많아 태국을 여행하는 기분을 내기에도 좋았다. 메뉴판에는 무려 254개의 메뉴가 있는데, 쏨땀만 해도 3가지, 디저트만 10가지나 된다. 디저트 종류가 많아서 선택이 어렵다면 떡처럼 생겼지만 코코넛 밀크 덕분에 아주 부드럽고 품위 있는 단맛이 나는 ‘카놈 투어이’를 꼭 먹어보기 바란다. 코로나19로 실의에 잠겼던 자영업자 친구가 “그래도 인생은 행복해”라고 외쳤을 정도로 맛있다.


이민영 관광인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