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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by오마이뉴스

공녀, 그들은 진상품이었다

오마이뉴스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 즉, 병사·말 형상의 부장품. 여기에서 용俑은 장례에 부장품으로 쓴 사람의 형상을 가리키는데, 사람 순장을 대체한 것이다. ⓒ 연합뉴스

황제가 죽자 순장된 궁인이 30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였다. 식사가 끝난 뒤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하는 소리가 궁궐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매 죽게 되었다. (조선 여자) 한씨가 죽을 때 김흑에게 말하였다. "유모, 나는 가오. 유모, 나는 가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내어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죽자, 후임자인 홍희제는 영락제의 후궁들을 함께 묻습니다. 저세상에 가서도 황제에게 봉양해야 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인 조선사람 한씨의 유모 김흑이 생환하여, 순장되던 상황을 위와 같이 증언합니다.


실록 기사에 등장한 한씨와 최씨, 그들을 역사는 공녀貢女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공貢이란, 아래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가 윗권력에게 바치는 물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공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원나라 때 활성화되었던 사람 조공은 국가가 명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왕이 먼젓번에 보낸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여자들은 모두 음식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우며, 제조하는 것이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세종실록 16년 12월 24일)

명의 제5대 황제인 선덕제는 조선에서 보낸 집찬비執饌婢, 즉 음식 만드는 계집종의 솜씨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 외에도 가무를 제공하는 창가비娼歌婢, 여러 잡무를 처리할 계집종, 그리고 황제의 후궁으로 삼을 양반가문의 아름다운 처녀를 명 황실로 보냈습니다.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이 황제의 명을 알렸다.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임금이 말하였다. "사대事大의 예禮를 내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어서 이미 처녀 다섯 명을 준비해두었다." (태종실록 17년 5월 2일)

임금이 황제에게 보낼 처녀를 직접 간택하였다. (세종실록 8년 12월 9일)

사대 곧 큰 나라를 섬긴다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에서는 중국의 공식 및 비공식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처녀 조공인 것이지요. 영락제부터 선덕제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26년간 7회에 걸쳐 114명의 공녀를 보냈습니다. 세종시대만 따져보아도 임금이 직접 면접을 본 횟수가 16회나 될 만큼 황제에게 보내는 처녀의 선발은 국가 차원의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 등이 의정부(국가 최고 행정기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전국의 처녀를 함께 선발하였다. 황엄이 처녀들 중에 미인이 없다고 노하여, 경상도로 왕이 파견한 환관 박유를 잡아다 결박하고 취조하였다... 곤장을 치려다 그만두고, 교의(임금이나 3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앉는 의자)에 걸터앉아 정승을 앞에 세우고 욕을 보이고 나서 태평관(사신의 숙소)으로 돌아갔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의정부 대신에게 하대하며, 왕명을 받잡고 처녀를 고르러 지방으로 파견된 이를 직접 처벌할 만큼 명나라 사신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황제를 대행한다는 명목을 띠고 온 그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조공할 처녀의 선발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음과 같은 순서 및 기준에 따랐습니다.

진헌색(중국에 보낼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한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계집아이를 모으고, 전국의 시집장가를 금지하였다... 경차관(특수 임무를 주어 지방에 파견한 관리)을 각각의 도에 나눠 보내서 처녀를 뽑게 하였다. 공공 및 민간의 천민과 노예는 제외하고, 좋은 집안의 13세 이상 25세 이하 처녀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 조금 뒤에 또 임금이 환관을 전국에 보내서 처녀를 간택하니, 전국의 민심이 흉흉하게 동요하여 몰래 혼인을 맺는 자가 매우 많았다.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이날 (사신이 면접하는 자리에서)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행정안전부 격인 이조에 속한 정3품 관리)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군수품 관리 기관) 이운로의 딸은 다리에 병이 든 것처럼 절룩거리니, 황엄 등이 매우 노하였다. 헌사(현재의 검찰·감사원)에서 조견 등이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 아전을 보내서 도망 못 가도록 지켰다. 조견은 개령(현재의 경북 김천)에 이운로는 음죽(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강제 거주시키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규수'를 찾기 위해 전국으로 관리가 파견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차출을 피하기 위한 온갖 방책이 등장합니다. 집안에서는 국가의 금혼령을 어기고 몰래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공녀 후보로 발탁된 여성들은 면접관 앞에서 신체 혹은 정신에 장애가 있는 양 행동합니다.


국법 혹은 왕명을 어겨 처벌을 받는 것보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보내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붙이로 연명해나가는 일이 비교 안 될만큼 무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한 울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사신과 일곱 명의 처녀가 (경복궁의 동쪽 문) 건춘문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고 울면서 보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실록 9년 7월 20일)

세 사신이 (간택된 처녀) 한씨를 모시고... (명나라로) 돌아가니...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의 언니 한씨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인데, 이제 또 (동생마저) 가는구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산송장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10년 10월 4일)

앞서 보았던 영락제의 후궁 한씨가 순장당한 4년 뒤, 그의 동생마저 공녀로 차출되어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그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보았던 사건에 이제는 당사자가 되어 떠밀려 들어갑니다. 자신도 죽은 목숨이라 여겼겠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나라냐?'고요.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 정당화될 수 없어

(명나라) 사신 이충·김각·김복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처녀 몸종 9명, 창가비 7명, 집찬비 37명을 거느리고 왔다. (세종실록 17년 4월 26일)

세종 17년인 1435년에 공녀 53명이 귀환한 후, 명 황실에 대한 처녀 조공은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청나라로 전환된 뒤에 재개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근로정신대·일본군성노예로 재현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희생으로 국가를 유지했다고, 약소국의 외교란 그런 것이라고요. 그렇다고 하여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 및 사회 차원의 거래라는 구조를 가리고, 개인의 선택 혹은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따라서 피해자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피해 당사자에게 입을 다물도록 강요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정신대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재점화되었습니다. 특정 역사를 부정하려는 시도 또한 격렬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사회가 현 사안을 회피한다면, 우리의 누이가 딸이 이웃이 유린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공녀는 특수한 한 시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목도해왔습니다. 이번이야말로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아픈 역사를 직시할 때입니다.


오채원 기자(story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