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갈 수밖에, 개도 여행
배낭 하나 메고 떠났던 그 시절의 개도 여행. 푸근한 인심이 가득 묻어났던 장어탕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 그 맛을 잊지 못해, 또다시 떠났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섬
개도는 여수시 317개 섬 중에 돌산도, 금오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야도, 낭도, 하화도 등과 함께 화정면에 속해 있다. 6개의 마을과 여객선이 들고 나는 3개의 항이 개도에 있다.
청석포고개에서 바라보면 신흥마을이 오롯이 눈에 들어온다 |
개도는 몇 년 사이 걷기 붐이 일면서 많은 탐방객이 찾아드는 섬이 되었다. 섬에는 주민들이 평생토록 지르밟으며 땔감을 하러 다니거나 소몰이하던 길이 있었다. 총 3개 코스의 ‘개도사람길’은 그 삶의 자취를 따라 조성됐다. 특히 2코스 막바지의 벼랑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은 개도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천재봉 벼랑에서 시작해 배성금, 청석금, 청석포해변을 두르고 솔머리산이 감싸 안은 삼각 바다는 마치 칼데라호의 느낌마저 들게 한다.
예전 주민들은 모전해변의 몽돌 위에 멸치를 널어 말리곤 했다 |
개도는 새로운 백패킹 성지로도 인기몰이 중이다. 야영지로는 모전몽돌해변과 청석포해변의 너럭바위 지대가 꼽힌다. 모전해변의 넓고 편편한 몽돌밭은 도로와 인접해 접근이 쉽고 뒤편에 마을이 있는 것 또한 이점이다. 한편, 청석포는 해변을 이루는 돌의 색깔이 푸른빛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파도가 센, 지형적인 이유로 해변은 다소 거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맑은 날씨에는 제주도까지 조망될 정도로 시야가 좋다. 바다로 뻗어 난 너럭바위는 과거 개도 사람 전체가 모여 화전놀이를 했을 만큼 넓고 편평하다. 요즘 백패킹의 추세는 ‘익스트림’이다. SNS에 올릴 텐풍(텐트 풍경)이라면 더욱 그렇다. 청석포 너럭바위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스폿이다.
청석포해변에는 바다를 향해 뻗어난 암반 지대가 있다 |
예로부터 개도는 물맛이 좋았다. 섬의 남쪽 천제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청정수는 개도막걸리의 근원이 되었다. 먹거리 역시 풍부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참전복은 적당한 수온에다 파도의 영향을 덜 받는 독특한 지형 탓에 찰지고 맛이 좋다. 풍부한 해산물에다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고유의 솜씨를 더한 개도의 음식들은 탐방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탐방객들은 열심히 섬을 걷고 막걸리를 마시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마무리까지 흐뭇하게 만들어 주는 섬이다.
꿈결 같던 갯마을식당
열정이 분기탱천하던 10여 년 전, 섬 전문 백패킹 크루를 결성한 적이 있다. 번역기를 돌리고 돌려 만든 이름은 ‘이졸로또’, 이탈리아어로 ‘작은 섬’이란 뜻이다. 이졸로또는 그 첫 여행지로 여수 앞바다의 개도를 골랐다. 그런데, 트레킹과 캠핑을 통해 섬의 진면목을 알아 가자던 건전 무구한 계획은 입도 후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다 개도막걸리와 갯마을식당 때문이었다.
개도사람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가을 정취를 만나게 된다 |
얼마 전, 남희씨가 인스타그램에 막걸리 카페를 오픈했다는 내용의 피드를 올렸다. 어찌나 반갑던지. 요즘의 개도가 조바심이 콩콩 나도록 궁금해졌다. 남희씨는 개도주조장의 따님이다. 모전해변 몽돌밭에 텐트를 치고 있을 때, 막걸리 박스를 직접 배달해 주면서 인연이 된 사이다. 개도를 가야겠단 결심이 순식간에 세워졌다.
마을의 정자는 주민들도 탐방객도 쉬어 가는 꿀맛 같은 장소다 |
백야도를 떠난 여객선은 20분 만에 개도 화산항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다. 이졸로또를 이끌고 개도에 왔을 때, 갯마을식당은 들르지 말았어야 했다. 섬 길을 걷다가 별촌방파제 모퉁이에 다다랐을 무렵, ‘뒤편에 선술집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어’란 뜬금없는 바람이 생겨 난 건 운명이었을까? 그 순간 갯마을식당이 꿈 같이 나타난 것도.
농협창고에 기대선 허름한 횟집 겸 식당. 그 시절, 수육 한 접시와 개도막걸리가 상에 올랐을 땐, 기다렸다는 듯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른 손님이 주문한 생선회 몇 점과 곰국보다 뽀얀 지리탕을 슬쩍 내어 주던 이모님의 눈웃음. 당연히 취할 결심을 할 수밖에.
여전한 장어탕의 맛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모님이 보였다. 예전보다 조금 여위셨고 흰머리도 느셨다. 몇 년 전, 배우 임원희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의 개도 편에 나오셨을 때만 해도 여전했는데. “저 알아보시겠어요? 아볼타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활짝 웃으며 그녀가 반긴다. “아이고, 이게 누구여. 얼마 만인가?”
방송에 자주 출연해 개도의 유명인사로 불리는 갯마을식당 이모님 |
안부 인사를 격하게 나누고는 장어탕을 주문했다. 당일에 잡은 큼직한 바다장어를 된장 베이스로 푹 고아 끓여 낸 갯마을식당의 장어탕은 <한국인의 밥상>에도 등장했던 별미 중 별미다. “이제는 장어탕 안 해. 내가 좀 아팠거든. 그래서 요즘은 생선구이 백반하고 서대무침만 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냉동실 깊이 넣어 두었던 장어를 꺼낸 후,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냉동이지만 오랜만에 왔응께, 먹고 가야지.”
된장 베이스에 시래기가 들어가는 갯마을식당의 듬삭한 장어탕 |
비록 생물의 탱글함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구수하면서 칼칼한 국물 맛은 여전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이 맛을 보려고 새벽같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시절이 있었다. 배낭과 텐트의 추억마저 소환되던 그때, 테이블로 다가선 그녀는 접시에 담긴 김치 포기를 손으로 쭉쭉 찢기 시작했다. 이런 게 정이라며.
청석포바위지대가 핫해지기 전, 백패커들의 야영지는 모전해변이었다 |
틈틈이 만나도 평생 가는 인연
남희씨가 새로 오픈한 ‘도가카페’는 개도주조장 안에 있었다. 슬쩍 들어가 인사를 건넸더니 “어, 맞죠?” 하며 나를 곧장 기억해 줬다. 섬이라서 가능한 얘기다. 틈틈이 만나도, 평생 가는 인연이다.
도가카페는 개도를 찾는 여행자들의 정겨운 쉼터가 될 예정이다 |
도가카페는 버라이어티한 공간이다. 커피는 물론이고 파전 등의 간단한 안주에 개도막걸리도 마실 수 있다. 게다가 막걸리는 단돈 2,000원이다. 그녀가 카페를 차린 이유는 개도막걸리로 새로운 콘텐츠에 도전하고 싶어서다. 야심 차게 개발했다는 막걸리쉐이크부터 시음해 봤다. 단맛 너머로 스멀거리는 막걸리 향이 기발하다. 술 못하는 사람이라면 취할지도 모른다. 이래 봬도 진짜 개도막걸리가 들어간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깔끔해서 특히 여성들이 좋아하는 개도막걸리 |
마침 공사차 섬에 들어온 일꾼이 막걸리를 사러 왔다. 남희씨가 김치를 가지러 간 사이, 카페에 나와 있던 어머님이 막걸리 한 병을 슬쩍 비닐봉지에 더 넣었다. 푸근하고 따뜻한 섬 인심이다.
▶여객선
ㆍ여수연안여객터미널→개도
화산항 2회 운항
ㆍ백야도→개도
화산항 10회 운항
ㆍ여수연안여객터미널→개도
모전항, 여석항 1회 운항
*김민수 작가의 섬여행기는 대한민국 100개 섬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그의 여행기는 육지와 섬 사이에 그 어떤 다리보다 튼튼하고 자유로운 길을 놓아 줍니다.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곽서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