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니 더 잘 보이고, 더 잘 느껴지는 곳...진짜 부산 여행
양곱창 골목, 만두백반, 자갈치시장 그리고 초량의 168계단까지—나이 들어 다시 찾은 부산은 더 깊고 더 맛있다.
전경 피해 숨어들었던 자갈치시장
부산의 베네치아 장림포구
만두백반과 빙장회...진미천국
영도 깡깡이예술마을과 초량 이바구길
부산에 와 있다. 초량동과 영도를 걸었다. 그리고 먹었다. 돼지국밥도, 밀면도, 양곱창도. 참, 만두도.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 보니, 여행이란 게 별거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됐다. 좋은 데 가고 맛있는 거 먹는 것, 그게 여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은 최고의 여행지다.
![]() 영도 깡깡이마을의 벽화 |
여기는 부산 남포동이다. 정말 오랜만에 왔다. 30년은 된 것 같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주말이면 부산극장에서 영화를 봤고 국제시장 먹자골목에서 김밥과 어묵, 떡볶이로 배를 채웠다. 대학 시절에는 전경에게 쫓기며 시위를 하고 남포동 거리를 뛰어다녔다. 자주 남포동으로 나가 ‘가투’를 벌였고 그만큼 자주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자갈치 시장으로 숨어들었다.
시장 아줌마들은 쫓아온 전경들을 몸으로 막아주었다. 전경들이 물러가면 아지매들은 우리에게 생선과 오징어를 듬성듬성 썰어 소주와 함께 내주었다. “공부는 안 하고 와 맨날 데모질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먹자골목도 그대로고 국제시장도 그대로다. 자갈치도 그대로다. 다만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 ‘부산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장림포구 |
야구의 도시, ‘구도’ 부산
부산에서 가장 먼저 먹은 음식은 고등어구이 백반이다. 자갈치 시장 앞에는 진주식당과 오복식당, 할매집 등 고등어구이를 내는 집들이 나란히 서 있다. 백반을 시키면 탁자 위에 반찬 대여섯 가지와 된장국, 공깃밥이 오른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가 담긴 접시가 놓인다.
지금은 한창 야구 시즌이다. 야구팬들은 부산을 야구의 도시, ‘구도(球都)’라고 부른다. 롯데 자이언츠는 부산 사람들에겐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함께 간 일행과 함께 야구 이야기를 했다. “마흔 다 된 전준우가 1번을 치더라.” “윤성빈이 공 세 개로 삼진 잡을 때 울 뻔했다.” 옆자리에 앉아 막걸리를 드시던 어르신이 내게 물었다. “롯데 팬입니꺼?” “네. 92년 우승할 때 대학생이었습니다. 직접 가서 봤습니다.”
![]() (좌)고등어백반 (우)자갈치시장의 비빔당면 |
롯데 자이언츠, 무려 반 세기 전에 우승한 비운의 팀. 고등학교 다닐 때 자주 ‘야자’를 빼먹고 사직야구장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캬, 그때만 해도 멤바가 좋았지예.”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서는 얼른 “네” 하고 대답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김민호, 김응국, 박정태, 염종석, 주형광 등등 92년 ‘멤바’ 이야기가 나오면 자칫하면 길어질 수도 있다.
술을 마시고 있는데 우리 테이블로 막걸리 두 병이 건너왔다. 옆자리 할아버지가 말했다. “드이소. 롯데 팬인데 멀리서 오싰네.” 부산은 그런 도시다. 자이언츠 선수의 아들이 반에서 꼴찌를 해도, 아빠가 자이언츠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전교 회장을 하는 도시다. 아무튼 그렇다.
‘진짜’ 부산, 초량과 영도
막걸리 병을 비우고 초량동으로 갔다. 피란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동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두달 뒤 부산은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전쟁이 터지기 전, 부산의 인구는 40만 명이었지만, 부산이 남한의 최후 방어선이 되면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고 인구는 100만 명까지 늘어났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기간을 제외한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1,000여 일간 임시수도였다.
![]() (위) 초량 이바구길을 걸으며 부산의 옛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래) 168계단에서 바라본 부산 풍경 |
피란민들이 몰려들다 보니 당연히 살 곳이 모자랐다. 게다가 부산은 산이 많은 도시. 피란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에서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 판잣집을 지었고 이때 산복도로가 함께 만들어졌다. 지금 부산의 산복도로는 대개 이 시기에 닦인 것이다. 피란민들은 비탈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복도로를 따라 집을 지었고, 이 집을 터전 삼아 삶을 이어갔다. 낮에는 부두나 역에서 일하고 해가 지면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초량동에는 지금도 그 시절 피란민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데, 바로 ‘168 계단’이다. 이름 그대로 168개의 계단이 있어 이렇게 불린다. 그냥 다니는 것도 힘들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물지게를 지고 이 계단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2016년 생겨난 모노레일을 타면 꼭대기 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에서는 부산역과 부산항, 북항대교와 영도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내려다보인다. 168계단을 중심으로 ‘초량 이바구길’이 만들어져 있다. ‘이바구’는 이야기란 뜻의 부산 사투리다. 1.5~2킬로미터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부산 사람들의 곡진한 생과 그들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
![]() 깡깡이마을 곳곳에 있는 설치작품들 |
올드 부산을 대표하는 또 다른 여행지는 영도다. 영도 하면 떠오르는 영도 다리는 일제가 1934년 군수물자 동원 목적으로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이자 일엽식(一葉式, 한쪽만 들어 올리는 방식) 도개교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만남의 광장으로 애용됐다.
영도에는 ‘깡깡이 예술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대평동 옛 도선장 주변 동네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는 수리 조선업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됐다.
깡깡이마을이라고 불린 이유는 망치질 소리 때문이다. 배를 수리하려면 배 아래쪽에 붙은 조개와 이물질을 제거하고 녹을 벗겨내야 하는데, 온종일 이 작업을 하는 망치 소리가 동네에 가득했다고 한다. 많이 쇠락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조선 업체 12개가 운영 중이다.
지금 깡깡이마을은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새단장해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예인선을 개조해 꾸민 선박 체험관, 옛 영도 도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항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깡깡이 유람선’, 방문객들이 시계, 장식품 등을 조립해 볼 수 있는 ‘깡깡이 마을 공작소’ 등 즐길 거리가 곳곳에 숨어 있다.
양곱창과 만두 백반 … 한국에서 맛있는 것들이 가장 많은 곳
광주, 전주, 목포, 강진은 ‘맛’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다. 하지만 나는 부산이 이들 도시에게 맛에서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다. 초량동도 좋고, 영도도 좋고, 해운대와 광안리 바다도 좋지만 그래도 부산에서 가장 좋은 건 단연 음식이다.
그렇다면 부산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할까? 많은 사람들이 회를 떠올리지만, 아니다. 부산 사람들은 양곱창을 많이 먹는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서도 준석(유오성 분)이 서울로 유학 갔던 친구 상택(서태화 분)을 만나 회포를 푸는 곳이 바로 양곱창집이다. 그들은 철판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곱창과 대선 소주를 마시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 깡깡이마을의 벽화들 |
부평동 시장에도 양곱창 집이 늘어서 있다. 밤에 이곳을 찾으면 사람들이 손바닥을 비비며 삼삼오오 모여 좌판에서 양곱창을 구워 먹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부산의 양곱창은 서울과는 스타일이 약간 다르다. 고춧가루 양념을 하지 않는다. 대창, 소창, 염통이 한 번에 나오는데 이를 한꺼번에 번철에 올리고 지글지글 굽는다.
모둠 구이 큰 것이 5만 원 선으로 가격은 싼 편이다. 곱창이 구워지고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서 고소한 연기가 가득 뿜어져 나오면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도 이 연기와 냄새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양곱창을 굽다 보면 골목에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아직도 부산 양곱창 골목에는 ‘이동식 노래방’ 카트가 돌아다닌다. 시장에 가면 볼 수 있는 커피믹스를 파는 수레에, 커피 대신 노래방 기계를 장착했다.
노래 한 곡에 1,000원. 노란 등산 조끼를 입은 아저씨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다. “꽃 피이는 동백섬에~” 기분 좋게 얼굴이 달아오른 아저씨는 기분이 좋지만 듣는 사람은 약간 괴롭다. 솔 이상은 안 올라가는 것 같다.
![]() 푸짐한 양곱창 한 판 |
만두도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부산은 돼지국밥의 도시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만두의 도시다. 내공 있는 만둣집이 서울보다 많다(고 생각한다). 구포역 앞 금룡, 대신동의 편의방 등 부산의 오래된 동네 곳곳에 내공 있는 만둣집이 숨어 있다.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에도 신발원, 홍성방, 마가 등 만두를 잘하는 중국집이 늘어서 있다.
희한하게도 부산에서는 만두 백반을 먹는다. 영도에 있는 ‘복성만두’라는 곳에 아침 해장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업력 40년이 넘는 집이다. ‘아니, 어떻게 만두로 해장을?’ 하고 의문을 품을 분도 있겠지만, 부산에서는 만두 백반으로 해장을 한다. 사골육수로 만든 만둣국에 백반, 단무지와 김치가 함께 나온다. 경상도와 부산에서는 만둣국에 밥을 말아서 먹는다. 마지막 한 알은 톡 터뜨려 국물을 진하게 해서 먹는 것이 비결이다.
![]() 만두 백반 |
싸나이의 무뚝뚝함 속에 숨은 돼지 국밥의 진한 맛
부산에 갔으니 낙곱새도 먹어야지. 서울에도 낙곱새를 파는 집이 많은데 원조는 부산이다. 낙지와 곱창, 새우를 한 냄비에 넣고 끓이는 전골이다. 빙장회라는 것도 있다. 빙은 얼음 ‘빙’을, 장은 저장한다는 뜻의 ‘장’자를 쓴다. 그러니까 얼음에 저장한 회, 즉 얼음을 채워 재워둔 회를 말한다. 요즘이야 냉장고가 얼음을 대신하지만 냉장고가 없을 때는 회를 얼음에 보관했다.
부산 영도의 ‘멍텅구리’는 빙장회를 파는 횟집이다. 빙장회는 빙장회만의 맛이 있다. 굳이 활어회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회가 많다. 살짝 얼었다 녹은 한치회는 입에 넣었을 때 치즈가 녹는 것 같았다. 큼직한 우럭회는 우럭을 이렇게 질겅질겅 씹은 적이 있을까 할 정도로 굵다.
![]() (위)빙장회 (아래)양산국밥의 맑은 돼지국밥 |
부산에서는 초장과 된장을 섞어 참기름을 뿌리고 다진 마늘까지 넣은 무지막지한 장에 회를 찍어 먹는다.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회를 살짝 찍어 먹는 건 ‘부산 싸나이’의 법도가 아니다. 큼직한 회 한 점을 집어 막장에 푹 찍어 상추 위에 올리고, 다시 마늘 두 개와 고추를 더 올린다. 그리고 그 쌈을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부산에서 회를 먹는 스타일이다.
지금 나는 대신동의 어느 돼지국밥집에 있다. 대신동은 서울의 종로처럼 오래된 동네다. 관광객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맛있는 집들이 골목골목 숨어 있다. 자리에 앉자 앞치마를 두른 주인아주머니가 깍두기와 배추김치, 양파와 풋고추, 새우젓, 부추무침이 담긴 접시를 탁자 위에 툭, 툭 내려놓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경상도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홀에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는 돼지고기 육수가 담긴 커다란 솥이 뿌연 김을 뿜어내며 끓고 있었고, 한쪽 옆엔 삶은 돼지고기가 가득 올려진 커다란 나무 도마가 놓여 있었다.
![]() 자갈치시장 풍경 |
옆 테이블에 가족 손님이 앉았다. 아빠가 주문을 한다. “돼지국밥 세 개 주세요. 하나는 따로로 주시구요.” 주방에서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로는 아가(애가) 묵을라꼬예?(먹을 거예요?)”
옆 테이블에 국밥이 나왔다. 슬쩍 살펴보니, 뽀얀 국물 속에는 머리 고기와 앞다릿살 등 다양한 돼지고기 부위가 푸짐하게 담겨 있다. 비계가 적당하게 붙은 고기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아이의 뚝배기에는 먹기 좋은 살코기만 가득 담겨 있다. 부드러운 목살 부위인 것 같았다. 주인이 아이의 국밥에는 일부러 살코기만 골라 넣어준 것이다. 아이는 국물에 밥을 조금 말고 살코기를 건져 소금에 찍어 먹으며 잘도 먹는다.
![]() 자갈치시장 풍경 |
부산은 그런 동네다. 나이 들어 찾으니 디테일이 더 잘 보이는 동네. 나이를 먹어서 좋은 건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나이를 먹는 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지만 나이가 들어야만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또 그만큼 생겨난다.
조미료가 가득 들어 있는 음식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먹을 줄 알게 되고, 사람과 풍경을 한 걸음 물러서서 볼 줄 알게 되는 것. 젊었을 때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여러 가지 디테일들이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부산에 가보시길. 무뚝뚝해 보이는 부산 사람들의 마음이 잘 삶은 돼지고기처럼 야들야들한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부산 여행 정보
![]() (좌)황산밀면 (우)옹골찬의 곱새황산밀면 |
양곱창 골목에서는 ‘대양양곱창’이 유명하다. 해운대 ‘양산국밥’에서는 국물이 맑은 다소 독특한 돼지국밥을 맛볼 수 있다. 부산역 앞 ‘황산밀면’은 정통 부산식 밀면을 내는 곳이다. 깡깡이 예술마을에 자리한 ‘복성만두’는 직접 만든 군만두와 만두백반이 유명하다. 초량 ‘옹골찬’이 낙곱새를 잘한다.
‘장림포구’는 부산 여행에서 SNS에 가장 자주 올라오는 곳이다. 알록달록한 컨테이너 하우스가 늘어서 있어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연상시킨다. 이 산책로 덕분에 커플들 사이에서는 ‘부네치아(부산+베네치아)’로 불리는 곳이다. 화려한 무지개 색깔을 입힌 건물과 배가 떠 있는 포구가 어울려 낭만 그득한 분위기를 낸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