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갱식이! 냉장고를 부탁한다

[푸드]by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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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식당의 ‘갱시기’. 사진 이우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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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큼 먹으러 돌아다녔대도 ‘갱시기’하면 잘 모른다. 워낙 경상도 내륙 지방에서만 먹던 가정식인 데다 정작 이걸 파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구, 경산, 영천, 성주, 고령 등 경상북도 내륙이나 진주, 합천, 산청, 거창 등 서부 경남 출신이 아니라면 먹어본 이가 별로 없다. 게다가 이름도 각각 달라서 더욱 알쏭달쏭한 음식이다. ‘갱국’, ‘밥국’이라 하기도 하고 경남에선 또 ‘국시기’라고 부른다.


갱시기는 글자 그대로 조리하면 되니 밥국이 맞다. ‘국 갱(羹)’자를 쓰고 ‘밥 식(食)’자를 붙여 갱식이(갱시기)가 되었다. 경남의 국시기와 같은 조어(造語) 원리이다. 한자 쓰기를 좋아하는 경북 사람들이 따로 ‘갱식’이라 불렀을 뿐이다.


조리법도 간단하다. 마른멸치 몇 마리를 커다란 솥에 던져놓은 다음, 찬장과 냉장고를 뒤져 김칫국물, 콩나물, 푸성귀, 식은 밥, 가래떡, 국수 등을 모두 때려 넣고 팔팔 끓이면 완성된다. 전형적인 ‘냉장고 청소형’ 메뉴다. 멸치육수에 김치를 넣었으니 한국인이라면 싫어할 수 없는 맛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특히 호남 사람들이 보면 “이걸 음식이라고 먹어?” 하고 놀랄 정도로 외형이 얄궂다. 너무도 많은 허드레 재료가 한번에 질펀히 들어갔으니 마치 군대 잔반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김치 때문에 국물이 벌겋고, 밥과 국수가 퍼지면서 걸쭉한 상태가 되기에 더욱 그렇다.


덕분에 ‘개밥’이란 오명을 쓰기도 하지만, 궁핍하던 시절 이 지역 사람들이 자주 먹던 음식이다. 영남 출신 40대 이상에겐 추억의 음식, 힐링 푸드로 꼽힌다. 아버지가 술 마시면 다음 날 아침상은 바로 갱시기였고, 누군가 감기에 걸렸대도 그랬다. 심지어 겨우내 하루 한번 상에 올랐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애환이 깊은 음식이다. 대구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갱시기를 좋아해, 취임하자마자 청와대 조리장을 불러다 조리법부터 가르쳤다는 말도 전해진다.


사연이 이러하니 집마다 맛이 다르고, 같은 집도 어제오늘 그 구성이 달라진다. 만들기 어렵지는 않지만 맛있게 하기도 어렵다. 일단 김치가 맛있어야 한다. 시원한 경상도식 김장 김치를 시큼할 정도로 곰삭히면 더 좋다. 그래서 김장 김치가 폭 삭고, 설날 먹고 남은 가래떡이 있는 요즘 갱시기가 맛있다.


가정식이다 보니 이를 파는 식당도 별로 없는데 경남 합천군 읍내에는 국시기를 메뉴로 내건 옥천식당이 있다. 김치, 콩나물, 가래떡, 국수를 넣고 끓여준다. 아침 댓바람에 뜨끈한 국물을 훌훌 흘러 넘기니 해장에도 제격이다. 시원하고도 새콤한 국물을 푹 퍼진 밥알과 함께 삼키면 든든하기도 하다. 비주얼보다 맛이 좋고 아무 데서나 맛볼 수 없는 메뉴니 여행 중 힐링 삼아 꼭 찾아 먹게 된다.(합천군 합천읍 동서로 51-1/6000원)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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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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