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을 '누룩' 한 우물 판 그 남자, 조선 시대 '천상의 술' 되살렸다

[푸드]by 한국일보

한영석 전통 누룩 1호 명인 인터뷰

롯데百서 '한영석 백수환동주' 출시

2011년 척수염 치료차 전통주 교육

3대 전통주 백수환동주 맛보고 충격

13년간 녹두누룩 연구 끝에 결실

최근 ‘올해 최고의 약·청주’ 선정

2022년 출시한 청명주도 매번 완판

“와인·사케 같은 글로벌 명주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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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석 한영석발효연구소 소장이 8월 20일 전북 정읍 연구소 내 누룩발효실에서 발효 중인 전통 누룩을 소개하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전통 누룩을 띄우려면 90일이 걸리는데, 한 소장은 누룩발효실의 온도·습도·바람·산소량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기간을 45일로 단축했다. 발효가 끝난 누룩은 햇볕에 말려 살균하는 법제 과정(5일)을 거쳐 완성된다. 쌀에 단일 곰팡이균을 흩뿌려 만드는 일본식 누룩 '입국'과 달리 우리나라 전통 누룩은 공기 중 떠다니는 여러 누룩곰팡이가 자연스럽게 내려앉도록 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정읍=박준석 기자

어떻게 술에서 이런 맛이...

한영석(54) 한영석발효연구소 소장은 13년 전 맛본 술맛을 잊지 못한다. 2011년 1월 그는 전통주 교육 기관인 한국가양주연구소에 등록했다. 술이 좋아 간 건 아니었다. 40대 초반 나이에 척수염을 앓고 있었다. 병에 좋다는 발효 식초를 공부하다 형제 격인 술에 관심이 생긴 터였다. 류인수 연구소장이 이전 기수가 빚은 술이라며 한 잔을 건넸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주량은 소주 한 잔이지만 와인·위스키 등 웬만한 술은 다 마셔본 그였다. 생전 처음 접하는 향과 맛이었다. 이 술을 꼭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했다. 3대 전통주로 꼽히는 백수환동주(白首還童酒)였다.


그때부터 한 소장은 곡물과 누룩, 물만 사용해 복합적 풍미를 만들어내는 전통주 매력에 푹 빠졌다. 경기 수원시 집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누룩을 띄우고 술을 빚는 작업을 반복했다. 백수환동주는 난제였다. 전통주 중 유일하게 녹두가 주재료인 누룩을 써야 했다. 수분이 많은 녹두는 누룩을 띄우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10년이 지나도 성공률이 50%가 안 됐다. 만들고, 또 만들었다. 녹두 값만 2억 원 넘게 들었다. 그는 “정말 24시간 술만 생각했다”고 했다. 2023년부터 열에 아홉은 성공하는 수준이 됐다. 누룩만 있으면 술 빚기는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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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전북 정읍시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한영석발효연구소 입구에 붙어 있는 명인 간판. 한영석 소장은 2020년 7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인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로부터 국내 첫 전통 누룩 명인으로 지정됐다. 정읍=박준석 기자

한 소장은 올해 전통주 분야 최고 권위의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 백수환동주를 출품했다. 최근 약·청주 부문 대상에 뽑혔다. 전통주 문외한이 13년 만에 정상 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제 소비자가 맛볼 차례다. 현재 백수환동주 300병이 롯데백화점에서 판매 중이다. 조선시대 술 제조법을 기록한 양주방(釀酒方)에는 " (백수환동주) 한 말에 한 기(12년)의 수(생명)를 더 한다 했으니 더러운 사람이 배우게 하지 말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귀한 술이 제품으로 만들어진 건 처음이다.


20일 한영석발효연구소에서 만난 한 소장은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으면 몇 년이 지나도 맛이 기억나는데 백수환동주가 그렇다"며 "술의 제왕"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 전통 누룩으로 만든 전통주를 프랑스 와인, 일본 사케와 함께 세계 명주 반열에 올려놓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정읍 쌀, 전통 누룩, 그리고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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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전북 정읍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한영석발효연구소 전경. 경기 수원시 집 근처에 92㎡ 규모 작업실을 얻어 전통 누룩을 연구해오던 한 소장은 2018년 이곳에 연구소를 세웠다. 한 소장은 내장산의 풍경이나 정취가 너무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가 매년 정읍 농가로부터 구매하는 최상급 햅쌀은 50톤(t)에 달한다. 2025년 새 공장이 지어지면 햅쌀 구매량이 연간 150t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읍=박준석 기자

한 소장은 술을 빚을 때 전통을 고집한다. 이날 연구소에는 물에 갠 찹쌀가루 20kg이 담긴 대야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정읍에서 재배한 최상급 햅쌀이다. 이 찹쌀 반죽을 원반 모양으로 성형한 뒤 45일 동안 발효시키면 누룩곰팡이와 효모균이 붙어 자란다. 이렇게 만든 전통 누룩을 잘게 부순 다음 물과 고두밥(증기로 찐 밥)과 섞는다. 곰팡이가 쌀의 전분을 포도당으로 분해하고 효모가 당을 먹으며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누룩(50일), 술 발효(60일), 숙성(30일)까지 5개월이 걸린다. 그는 " 전통 누룩을 직접 띄워 술 빚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는다"고 했다. 그가 2020년 7월 우리나라 첫 전통 누룩 명인에 선정된 배경이다.


사실 한 소장은 술을 직접 빚을 생각까진 없었다. 전통 누룩을 양조장에 보급하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양조장들은 전통 누룩을 찾지 않았다. 일본식 입국(粒麴·쌀에 한 가지 누룩곰팡이만 인공 배양한 것)을 선호했다. 단일 곰팡이라 술맛이 단조롭지만 값이 싸고 발효 시간도 짧았기 때문이다. 전통 누룩을 써야 다양한 곰팡이가 발효에 참여해 명주가 나온다고 얘기하면 "누룩을 쓰면 역한 냄새가 난다"는 답만 돌아왔다. 전통 누룩으로 상업 양조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해야 했다. 백수환동주에 앞서 한 소장이 청명주 제조에 나선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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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석 한영석발효연구소 소장이 8월 20일 전북 정읍 연구소 내에 있는 700L 발효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소장이 직접 띄운 전통 누룩과 물, 그리고 증기로 찐 고두밥을 발효조에 넣으면 누룩 속 곰팡이가 쌀의 전분을 포도당으로 분해하고, 효모가 당을 먹으면서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연구소에는 이런 발효조가 총 18개 있다. 정읍=박준석 기자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이 최고의 술로 꼽은 청명주는 특유의 산미가 핵심이었다. 한 소장은 “산미를 내려면 발효 과정에서 술효모와 다른 미생물이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고 했다. 술 효모가 지배종이 되면 술에 과실 향을 더해주는 미생물이 활동하지 못하고 알코올만 남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고두밥을 짓기 전 찹쌀을 오래 불려 수용성 물질이 빠져나가도록 했다. 단백질, 비타민 등 영양소를 뽑아내 술 효모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알코올 생성을 늦추기 위해 발효 온도도 저온(13.5도)으로 맞췄다. 그렇게 수백 회 넘는 실험을 거쳐 2022년 3월 '한영석청명주'가 세상에 나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초도 물량 3,500병이 며칠 만에 다 팔렸다. 375ml 한 병에 2만6,000원으로 값이 꽤 나갔지만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었다. 한 병을 마셔도 좋은 술을 마시려는 2030세대가 주 고객층이었다고 한다. 20회 차에 걸친 온라인 판매가 완판됐다. 한 소장은 “몇 년 전만 해도 전통 누룩으로는 상업 양조를 할 수 없다는 게 업계 내 보편적 인식이었는데, 청명주와 백수환동주로 그게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고 했다.

와인 소믈리에도 반한 전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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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백화점이 8월 26일부터 추석 선물 세트로 판매하고 있는 ‘한영석 백수환동주·청명주 세트(17만3,000원)' 모습. 롯데백화점 제공

경민석 롯데백화점 와인&리커팀 치프바이어도 뒤늦게 한영석청명주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제4회 올해의 한국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 출신으로 온갖 술을 접해본 그조차도 "곡류만으로 어떻게 이런 풍부한 과실 향이 날 수 있나" 감탄했을 정도다. 프리미엄 전통주 라인업을 넓히던 경 바이어는 올해 3월 서울 중구 소공동 본점에 팝업스토어를 열고 한영석청명주 300병을 배치했다. 다 팔렸다. 백수환동주도 극소량 입고해 시음회도 열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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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정근 기자

경 바이어는 두 제품을 추석 선물로 파는 2차 협업을 추진했다. 한 소장도 흔쾌히 응하면서 26일부터 '한영석 백수환동주·청명주' 세트 300개 한정 판매가 시작됐다. 백수환동주의 첫 공식 판매다. 경 바이어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프리미엄 전통주 시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한 소장의 다음 목표는 세계다. 2025년 6월 1,300㎡ 규모 신공장을 완공해 양조장 규모를 키우고 수출 장비도 갖출 계획이다. 얼마 전 백수환동주를 맛본 프랑스인은 "1,000만 원짜리 보르도 고급 와인 같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프랑스 와이너리 관계자는 “포도 진짜 안 넣었느냐” 질문을 반복했다고 한다. 와인에 떫은 맛을 더하는 탄닌이 느껴졌기 때문. 녹두에서 나오는 맛이다. 한 소장은 "사케가 100년 만에 세계적 술이 됐는데 전통주도 가능하다"고 했다.


정읍=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2024.08.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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