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갈아만든 배'로 술을 빚다
배, 이제는 술로도 즐깁니다. 전통 이강주부터 배 와인, 배 막걸리, 배 증류주까지 청량한 향과 달콤한 풍미를 담은 K-리큐르의 세계.
![]() '우리가 직접 가꾼 황실배예요' [연합뉴스 자료사진] |
사과와 함께 한국인이 가을철에 즐겨 먹는 대표적인 과일인 배는, 삼한시대 기록에도 나타나는 오랜 역사의 전통 과일이다.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인왕산 기슭에 집을 짓고 자연 풍광을 즐기며 살았다. 그는 주변 경치를 관찰하며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선정했다. 그 경관마다 시를 짓거나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영시(詠詩) 48편을 남겼다. 선정된 시제 가운데에는 '옥각이화'(屋角梨花, 집 모퉁이 배꽃)도 있었다. 성삼문은 이 시제를 받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봄비 내리던 날 석잔 술을 마시고
살짝 취한 채로 꿈나라로 갔다가
단꿈을 깨고 두 눈을 떠보니
빙설 같은 꽃잎이 석양에 비치네
조선 시대 학자 허균의 '도문대작'을 보면, 당시 이미 다양한 품종의 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책에는 '하늘배'(천사리), '금색배'(금색리), '검은배'(현리), '붉은배'(홍리), '큰배'(대숙리) 등 지금은 보기 힘든 품종명이 기록돼 있다. 당시에는 이름도 예쁘고 개성 있는 배가 많았던 것이다.
야생 배나무의 이름도 매우 다양했다. 밭배나무, 콩배나무, 아그배나무, 돌배나무, 참배나무, 청배나무 등 그 종류가 많아 지역과 용도에 따라 불리던 명칭도 달랐다.
배는 크게 서양배, 중국배, 한일배로 나눌 수 있다. 서양배는 조롱박 모양으로 대부분 과육이 푸석푸석하고 물렁물렁해 생과로 먹기보다는 조리와 가공용으로 적합하다. 서양에서는 배를 통째로 설탕에 절이거나, 파이나 타르트 등 구운 디저트에 넣는 등 배를 활용한 요리법이 발달했다.
한편 중국배는 한국, 일본의 배보다 작아 주먹만 한 크기가 일반적이며, 손에 들고 하나씩 먹기 좋다.
배는 전체의 80~90%가 수분이며, 비타민과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소화에 도움을 준다. 변비 개선뿐 아니라 기관지 건강에 좋아 예로부터 가래와 기침 완화, 천식, 기관지염 치료에 쓰였다. 또한 배에는 항암 효과와 면역력 증진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 있으며, 아스파라긴산과 풍부한 당분·수분 덕분에 숙취 해소에도 효과적이다.
단백질 분해 효소가 있어 고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도 하기에, 육회나 불고기 양념, 김치·냉면 고명에도 널리 쓰인다.
◇ 한국의 배 산지와 배로 만든 전통주
우리나라에서 배 산지로 유명한 지역은 전라남도 나주, 경기도 안성, 충청남도 천안, 울산광역시 울주군 등이다. 이곳에서 수확된 배는 다양한 전통주로도 빚어졌다.
조선시대 배가 들어간 대표적인 술은 이강주다. 배 '이'(梨)와 생강 '강'(薑)을 사용한 전통주로, 배와 생강 외에도 울금, 계피, 꿀 등을 넣어 숙성시킨다. 조선 중기 이후 전라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주로 빚었으며, 정읍의 죽력고, 평양의 감홍로와 더불어 '조선 3대 명주'로 꼽힌다.
현대에 생산되는 배 증류주는 강원도 홍천 밤바치 돌배농장의 '까치돌배주'(16.5도)와 '프리미엄 까치돌배주'(47도)가 있다.
배로 만든 약주로는 국내 최대 배 산지인 전남 나주의 '정고집 남도탁주'에서 생산하는 나주배약주가 유명하다. 이 술은 2011년 전라남도 술 품질인증 1호를 획득했고, 2023·2024년 '우리술 품평회'에서 2년 연속 최우수상을 받았다. 또한 2023년에는 'iTi 국제 우수미각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국내외 인정 브랜드가 됐다.
![]() (왼쪽부터) 이강주, 까치돌배주, 프리미엄 까치돌배주, 나주배약주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
배가 들어간 막걸리 중에는 경기 안성의 한주양조가 만드는 '안성배막걸리'가 있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빚은 막걸리로 유명하며, 배 특유의 은은한 단맛과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강원도 홍천 강남도가에서는 '강남도가 배', '강남도가 꿀배' 등 다양한 과일막걸리를 선보이고 있다.
경기도 양평의 C막걸리는 건포도와 배를 넣어 만든 '건배'라는 제품이 있다. 기본 제품 C막걸리에서 주니퍼베리를 제외해 한층 가볍고 격식 없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든 배 막걸리다.
![]() (왼쪽부터) 안성배막걸리, 강남도가 배, 강남도가 꿀배, 건배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
배로 만든 와인, 즉 과실주도 생산된다. 전남 나주의 페어리 플레이는 국내 최초 '페리'(Perry) 전문 브루어리로, 배 과실을 발효해 만든 '이제'(梨製)라는 제품을 출시했다. 전북 부안의 내변산양조장은 배와 산삼배양근으로 만든 '천사의 선물'을,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딸기와인은 세인트하우스 스파클링 배와인 6도라는 술을 만들고 있다. 충북 충주의 댄싱사이더컴퍼니에서는 배와 꿀로 만든 '허니문배' 배사이더가 있다.
![]() (왼쪽부터) 이제, 천사의 선물, 세인트하우스 스파클링 배와인 6도, 허니문배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
배 증류주로는 배상면주가의 '나주배 아락 17', 천안 랩투보틀의 배 오크 숙성 증류주 '피어펙트 르네상스', 그리고 배혜정도가의 '로아 19 옐로우', '로아 40 옐로우'가 있다. 특히 '피어펙트 르네상스'는 한국형 꼬냑을 표방하며 출시 1년 만에 세계적인 주류 품평회에서 6회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흔히 배로 만든 술로 문배주를 떠올리지만, 사실 문배주는 배로 만든 술이 아니다. 메조와 찰수수를 원료로 한 증류주이며, 배향이 나는 이유는 '문배나무 열매'인 돌 배향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름은 배와 관련 있어 보이지만 원재료는 다르다.
![]() (왼쪽부터) 나주배 아락 17, 피어팩트 르네상스, 로아 19 옐로우, 로아 40 옐로우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
해외에서도 배로 만든 한국 음료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바로 국내 음료 브랜드 '갈아 만든 배'다. 로마자 알파벳으로 표기되지 않은 한글 '배'가 외국인들 눈에는 'IdH'로 보여, 해외 온라인상에서는 'IdH'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이 음료가 주목받은 특별한 이유는 숙취 해소 효과다.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에서 실험한 결과, 숙취 증상이 완화되고 특히 두통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호주 멜버른의 세븐일레븐에서는 '갈아 만든 배'를 성인 전용 숙취 음료로 판매하기도 했다.
배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고급 과일의 이미지를 지녔으며, 제사상에 오르는 몇 안 되는 과일 중 하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배를 생과일로 먹는 것을 넘어 술·음료·디저트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
청량하고 달콤한 배 향이 가득한 술 한 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우리의 배 문화와 그 향기는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