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겨울 굴, 바다가 알려준 생존법
겨울 굴이 왜 ‘바다의 보약’이라 불리는지 아세요?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굴 문화, 겨울 제철의 생명력, 약선에서의 효능까지 깊이 있게 풀어냅니다.
양식 굴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겨울바람이 바다 위를 스치기 시작하면, 한국의 해안은 굴의 계절을 맞는다. 찬물 속에 몸을 담근 채 바위와 줄에 단단히 매달려 자라는 굴은 차가운 바다를 마시며 서서히 살을 채운다. 겨울 동해와 남해를 훑고 지나온 바람 속에는 소금기와 미네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생명의 기운이 스며 있고, 그 기운을 가장 먼저 받아 품는 존재가 바로 굴이다.
겨울 굴 한 알은, 바다가 사람에게 건네는 작은 생명의 결정이다.
예부터 한국의 겨울 바다는 생존의 공간이었다. 남해와 서해 연안에서는 물이 빠진 갯벌과 바위틈으로 나가 칼과 낫으로 굴을 따냈다. 오늘날처럼 대규모 수하식 양식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빠진 틈을 타 돌과 암반을 더듬으며 굴을 캐오는 일이 온 가족의 겨울 일손이었다.
한겨울에 건져 올린 생명 한 알, 어머니들은 그 굴을 소금물에 조심스레 흔들어 씻고, 껍데기를 떼어 살만 골라 가족들 밥상에 올렸다.
굴까는 아낙네 [연합뉴스 자료 사진] |
생굴은 초장에 찍어 먹으면 겨울 바다의 냉기와 입 안의 온기가 맞부딪히며 묘한 균형을 만든다. 김장철에는 배추와 무 사이 사이에 굴을 넣어 김치를 담갔다. 어리굴젓은 굴을 소금에 절이고 삭힌 뒤 고춧가루와 섞어 만든 발효 젓갈로, 조선 시대부터 임금의 수라상에도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석화잡저'라 불린 굴 섞박지 역시 겨울철 진상품이었다. 굴은 이렇듯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자연의 보약이자, 겨울 동안 가족을 이어주는 정(情)의 매개였다.
굴은 스스로 바위와 줄에 달라붙은 채 파도와 겨울바람을 견디며 자란다.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물속과 바깥을 오가며, 영양염이 풍부한 해류를 걸러 먹는다. 바다의 거친 숨결을 모두 받아낸 몸이기에, 그 안에는 강한 생명력이 축적된다. 그래서 굴을 먹을 때마다 마치 겨울 바다의 힘줄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동양의 약선에서는 굴(牡蠣肉)이 심장과 간을 보하고, 좋은 혈액을 만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식재료로 기록된다. 자연의 생태 원리를 인간의 몸에 적용한 지혜다. 자연이 강하게 품은 생명을 사람이 받아들여 약으로 삼는 것이다.
굴의 맛은 차가운 바다의 맛이면서도, 따뜻한 인간의 온기가 더해진 맛이다. 갓 딴 굴을 까서 한입에 삼키면, 혀끝에는 소금기와 단맛이 맴돌고, 목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은 묵직한 감칠맛이 여운을 남긴다. 굴전이 기름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소리는 겨울 부엌의 음악이고, 굴국밥의 따끈한 국물은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온탕이다.
굴보쌈은 돼지고기 수육에 굴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겨울 별미로, 어머니들이 김장과 함께 가족의 체력을 챙기기 위해 준비하던 음식이다. 집마다 양념과 배합이 다른 굴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의 향을 품으며 한 집안의 겨울 기억을 완성한다.
굴전 [연합뉴스 자료 사진] |
한국의 굴 요리 문화는 바다·계절·사람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다. 우리 민족의 굴 섭취 역사는 선사시대 조개더미 유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유적에서 굴 껍데기가 다량 출토되는 것을 보면, 조개류 가운데서도 특히 굴을 많이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해안을 제외한 7도 대부분에서 굴이 중요한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겨울이 오면 굴은 바다에서 체액과 영양을 응축해 살을 찌우고, 사람들은 이 시기를 기다렸다가 굴을 캐어 겨울의 보약으로 삼았다. 바다와 사람이 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생태적 합의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천시(天時)'를 아는 지혜가 여기에도 스며 있다. 굴은 '때'를 아는 생물이다. 겨울에 가장 풍성해지고, 사람이 가장 필요한 시기와 자연이 주는 시기가 정확히 겹친다.
겨울 바다를 들여다보면 굴이 왜 한국인에게 특별한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굴은 깊은 바닷속이 아니라, 파도와 바람이 가장 거칠게 부딪히는 연안에 몸을 붙인다. 파도에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부드럽고 촉촉한 속살을 키워낸다.
이 이중 구조는 한국인의 삶과도 닮았다. 겉으로는 거칠고 단단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따뜻함과 끈질긴 생명력이 숨어 있다. 그래서인지 굴을 먹다 보면 묘하게 마음도 따뜻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굴 채취 현장 [연합뉴스 자료 사진] |
남해안 통영, 고흥, 거제 등지의 굴 양식장은 이제 겨울철 풍경의 일부가 됐다. 19세기 말 전남 고흥에서 양식이 시작된 뒤, 1960년대 경남 통영 등지에서 수하식 양식법이 본격 도입되며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인 굴 생산국으로 성장했다.
연승 수하식 양식 기술의 발달은 굴을 소수 지역의 진귀한 특산물에서, 누구나 겨울 상에 올릴 수 있는 대중적인 식재료로 바꾸어 놓았다. 각지의 굴 축제는 바다가 마을에 보내온 선물에 대한 감사의 의식이다.
마트의 생굴 [연합뉴스 자료 사진] |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