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민어, 전통과 건강의 한 입
왕실부터 서민까지 즐겨온 귀한 생선 민어. 회·탕·찜은 물론 부레·이석까지 버릴 곳 없는 전통 보양식으로, 단백질·불포화지방산·셀레늄이 풍부해 건강에 좋습니다.
![]() 민어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가을이 다가온 시기, 바다는 가장 풍성한 선물을 준다. 그 절정에 선 존재가 바로 민어다. 투명하게 빛나는 살, 깃처럼 부드러운 식감과 깊은 감칠맛, 모든 부위가 약재나 보양식으로 활용됐던 이 한 마리 물고기엔 생태와 역사, 음식 문화, 건강에 대한 삶의 경험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민어를 둘러싼 수많은 조리법과 전통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 위한 균형과 절제를 일깨운다.
◇ '백성의 물고기'에서 귀한 음식으로
민어는 한때 '백성의 물고기'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서민과 양반, 왕실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즐겼던 고급 어종이었다. 조선 시대 문헌에는 서해와 남해에서 많이 잡혔으며, 음력 7월 15일 백중절이나 추석 차례상, 잔칫상에 꼭 올랐다.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기록에는 민어가 당시 귀한 진상품이었고, 임금이나 장수한 왕들도 민어를 즐겼다고 전한다.
'민어'란 이름은 '면어'에서 비롯돼 백성 '민'(民)으로 한자가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잡는 이(어부)는 곧 백성이었지만, 먹는 이는 왕과 양반 등 사대부였다.
가장 많이 잡히는 계절엔 평민들도 맛볼 수 있었다. 커다란 크기 덕분에 잔칫상이나 행사, 제사에 오르고, 먹는 방법도 다양해 회, 찜, 탕, 어포, 알젓 등 버릴 곳이 없는 생선으로 활용됐다. 가장 값지고 뛰어난 민어는 여름철 산란기 직전, 즉 7~8월 잡힌 것이다.
민어는 미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부레는 풀(어교)로 만들어 장롱, 부채 등을 부치는 접착제로 썼고, '옻칠 간 데 민어 부레 간다'는 속담이 전해질 만큼 의식주 모든 곳에 스며 있었다. 부레는 고급 교착에, 이석은 약재, 살과 뼈는 보양식으로서 완전식품의 면모를 갖췄다.
동의보감, 난호어목지 등 고문헌에도 민어는 허약한 기력을 살리고 신장과 비위, 방광을 튼튼히 한다고 쓰였다. 민어살은 달고 짜며, 평(平)한 성질이라 여름 보양에 으뜸이었다. 부레는 지혈, 원기 회복, 이석은 해열과 이뇨 작용에 효과적이었고, 알젓은 진귀한 제수로 쓰였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민어 100g에 함유된 단백질은 20g이 넘으며, 열량은 90㎉ 내외(저지방), 지방은 1g 미만이다. 불포화지방산(EPA, DHA)은 동맥경화나 고혈압, 치매 예방에 기여하며, 항산화 미네랄인 셀레늄도 풍부해 노화·당뇨 예방에 좋다.
소화가 쉬워 아동·노인·질병 회복 환자 모두에게 추천된다. 민어는 흰살생선이라 어린이 성장에 이롭고, 부레에 함유된 콜라겐 단백질은 노후 피부와 조직 회복에 효과를 준다.
![]() 민어 껍질과 부레 [연합뉴스 자료 사진] |
◇ 손자병법의 '허실'과 밥상 위 민어의 변주
민어 조리법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허실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민어로 다양한 요리가 담고 있는 삶의 전략을 풀어보고자 한다. 손자병법 '허실의 장'처럼 때로는 비워두고(허), 때로는 채우는(실) 음식의 묘를 지닌다.
허한(기진한) 몸에는 민어회와 민어탕이 영양을 채워주고, 과식이나 더위 속 과로엔 담백한 민어찜이 균형을 되찾아 준다.
민어회는 미리 준비된 선점의 지혜와, 신선함과 허한 기력을 북돋우는 선점의 맛을 볼 수 있다. 민어탕은 절제와 유인, 국물의 시원함으로 허약 무력감을 달래고, 과욕을 경계하게 만든다. 민어찜은 기습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여름철 흔한 보양식 삼계탕과 장어 틈새에서 등장해 순수한 담백함으로 승부하기 때문이다.
![]() 민어회 [연합뉴스 자료 사진] |
민어전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 허와 실이 교차하는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다. 민어부레는 작지만, 무형(無形)의 힘을 갖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건강을 북돋우는 효험이 있다.
![]() 민어전 [연합뉴스 자료 사진] |
민어 매운탕은 속도와 기세, 얼큰한 국물의 열기로 허기를 밀어내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오늘날 민어는 남획과 수온 상승, 해양환경 변화로 점점 귀해졌고 가격도 뛰었다. 활어 유통이 어려웠던 시절엔 내륙에서는 명절이나 행사가 아니면 접하기 힘든 귀한 물고기였으나, 지금에도 명실상부 '여름철 최상 보양식' 혹은 '서민의 잊힌 민족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서울과 대도시에서는 삼복더위 보신용 특식, 남도 지역에서는 장례식과 제사상에 오르는 필수 음식이기도 하다.
민어 한 마리에는 바닷가 마을 노동자의 땀, 계절의 변화, 공동체의 협력과 분배의 전통, 음식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다. 민어가 춘하추동 잔치와 제사, 일용의 밥상 모두를 아우르는 생선이었다는 사실은 어느 시대에나 풍요로운 인생의 은유가 될만하다.
민어는 서민과 귀족이 모두 즐겨와 민족의 감정과 지혜, 시대의 흐름, 공동체적 나눔을 모두 모은 음식 문화의 보고다. 허하면 채워주고, 실하면 덜어주며, 몸과 마음·공동체와 일상 모두에 삶의 지혜를 일깨운다. 밥상 위 민어 한 점은 그 자체로 맛과 건강, 절제와 마음의 유연성을 가르쳐준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계절의 음식, 값비싼 귀물로만 남았지만, 우리가 민어를 통해 전통을 되살리고 감성을 복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과 건강, 지혜와 품격을 모두 챙기는 '승리의 밥상'이 될 것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